특별한만남
일본 속에 대한민국 정부의 터를! '재일 기업인 서갑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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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지는 만남관련인물이 없습니다. 낯선 일본땅에 내린 서갑호는 돈을 벌기 위해 닥치는 대로 일하기 시작했다. 오사카 상점의 수습점원으로 들어가 베 짜는 기술을 익혔고 사탕 판매, 폐품 수집, 수건공장의 기계 기름칠 등 몸을 아끼지 않고 일했다. 일본에서 재일 한국인은 민족 차별과 편견을 견디며 말로 다 할 수 없는 어려움을 겪어야만 했다. 서갑호는 오직 노력과 근면함으로 버티고 이겨나갔다. 일본의 항복으로 전쟁이 끝나자 사업의 기회가 찾아왔다. 군수 물자 매매로 많은 돈을 모으게 된 서갑호는 그 돈으로 폐기된 방적기들을 사 모아 사카모토 방적을 설립했다. 그때가 1948년 3월, 서갑호의 나이 서른넷이었다. 이후 그는 무섭게 성장해갔다. 1954년에는 오사카 방적을 설립하고 1956년에는 경영난에 허덕이던 히타리 방적을 인수하면서 서갑호는 일본 최대의 방적왕이 되었다. 1950년대 내내 서갑호 회장의 연간소득은 일본에서 5~8위를 기록하며 일본 면방업계의 실력자로서 일본 경제계에도 영향력을 미쳤다. 서갑호 회장은 성공의 명성만큼이나 오사카에서 교포를 돕는 일에 앞장서기로도 유명했다. 특히 민족 교육에 관심을 쏟았던 그는 재일교포학교인 금강학원이 재정난을 겪게 되자 개인 재산을 털어 도왔다. 어려서 집이 가난해 언양공립보통학교를 반만 다닌 것이나 다름없었던 서갑호 회장은 민족교육의 필요성이 얼마나 중요한지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1949년 일본의 조선초등학교 폐쇄령으로 문을 닫아야 했던 금강학원은 이듬해 일본 문부성으로부터 설립인가를 받아 수업을 재개하고 1951년에 학교법인 금강학원으로 다시 인가를 받았다. 같은 해에 서갑호 회장은 아예 금강학원 이사장으로 취임하여 매월 엔화 36만원을 학원 운영경비로 지원하고 1958년에는 엔화로 거금 7백50만원을 들여 금강학원을 새로 지었다. 외무성으로부터 이런 사실을 듣게 된 윤보선 대통령은 우리 교포들의 교육과 여러 자선사업에 많은 사재를 기울여 이바지한 공적을 인정해 서갑호 회장에게 공익포장을 수여했다.(1961년 2월 25일) 이는 조국을 위해 해외에서 활약하는 서 회장의 공적을 치하하고 교포들을 격려하기 위해서였다. 건국 이후 한국인에게 공익포장을 수여한 것은 서 회장이 처음이었다. 서갑호 회장은 한일국교 정상화 이전인 1951년부터 주일대사관(당시 주일대표부)의 부지와 건물을 무상으로 제공하기도 했다. 일본의 패전으로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됐지만, 당시 대한민국은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였다. 주일대표부는 사무실을 마련할 자금은커녕 운영자금마저 재일동포들의 후원금에 의존해야 했다. 서 회장이 소유한 도쿄 미나미아자부 중심 요지의 1만 218㎡ 면적의 땅은 예로부터 일본왕실의 친인척들과 일본의 권력실세들이 살던 집성촌으로 유명한 곳이었다. 서갑호 회장은 이곳의 땅과 건물을 아무 조건 없이 주일한국대표부에 임대하다가 조국의 발전에 헌신한다는 뜻으로 1962년 모든 소유권을 한국정부에 기증했다. 2013년 7월 18일, 정부는 주일대사관의 옛 청사를 헐고 새 청사를 개관했다. 주일 한국대사관 1층 자료관에는 서갑호 회장의 아호를 딴 동명실(東鳴室)을 마련하고 서갑호 회장(1915~1976)의 관련자료를 전시해 그의 조국애를 기리고 있다. 현재 일본에 있는 재일본대한민국공관 10곳 가운데 9개 공관은 재일한국인들의 모금 활동을 통해 혹은 개인의 기증으로 세워진 것들이다. 이처럼 해외교포가 다수의 공관을 기증과 모금운동을 통해 세운 일은 세계사에서 유례를 찾을 수 없는 일이다. (1)「신팔도기 (201) 울산<4>」 『동아일보』 1979. 6. 12 기사 내용을 토대로 창작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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