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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눔으로 빛나는 실리콘밸리 벤처 1세대, 이종문 회장

나눔으로 빛나는 실리콘밸리 벤처 1세대, 이종문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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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문 사진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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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지는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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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처기업가는 등반가와 같습니다. 몽블랑을 정복했으면
다음은 안나푸르나를 꿈꾸고 또 에베레스트에 도전해야 해요."(1)
- 이종문 회장, 2003년 한 언론사와의 인터뷰 중

미국 샌프란시스코 시청 앞 광장에 있는 아시아 미술관의 고풍스러운 건물 외벽에 한국인의 이름이 새겨지고 있었다. 몇몇 교민들은 흐뭇한 표정으로 그 광경을 지켜봤다. 'Chong-moon Lee Center for Asian Art & cultural Center&rsquo'. 미국에서 가장 큰 아시아전문박물관이었던 이곳이 예산이 모자라 문을 닫게 되었을 때, 한국 출신 기업가인 이종문 회장이 1,500만 달러를 기부해 박물관을 살렸다. 이를 계기로 박물관 측에서는 박물관의 이름을 '이종문 센터'로 바꿨다. 아시아계 이민사회에서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이 회장이 미국으로 건너간 것은 1970년. 국내 굴지의 제약회사인 종근당 창립자의 동생으로 종근당제약 전무까지 지낸 그가 갖은 고생 끝에 이민 12년 만인 54세의 나이에 소프트웨어 개발업체 '다이아몬드 멀티미디어 시스템즈(DMS)'를 설립했다.
오전 7시에서 오후 11시까지 일한다는 의미로 세븐일레븐이라는 별명이 붙을 만큼 쉬지 않고 일한 이종문 회장은 애플컴퓨터와 IBM의 호환시스템 개발에 성공하면서 급속도로 성장해갔다.
여기까지 오는데 세 번이나 자살을 시도할 만큼 최악의 실패를 견디고 버텨낸 그는 미국 워싱턴 아시아 아메리카 상공회의소에서 주는 올해의 기업인상을 93년과 94년에 걸쳐 2년 연속 수상하며 실리콘밸리 성공신화의 대열에 들어섰다.

성공의 열매는 크고 화려했지만 이종문 회장은 안주하지 않았다. 95년에 회사를 나스닥에 상장시키고 새로 영입한 CEO를 통해 회사를 매각했다. 파격적인 행보에 관한 질문에 그는 이렇게 답했다. 종업원들에게 현금을 쥐여주는 방법은 주식공개밖에 없었어요. 주변에선 어떻게 일으킨 회사인데 경영권을 포기하느냐고 말렸지만 죽을 고비에서 회사가 살아난 것은 천운으로 돌릴 수밖에 없어요. 하늘이 도와준 회사가 어떻게 내 것이겠습니까.”(2)
이 회장은 34명의 직원을 백만장자로 만들어주었다. 나스닥 입성을 통해 그가 거둔 수입은 10억6060만 달러. 한화로 약 1조2000억 원이었다. 이종문 회장은 암벡스 벤처캐피털을 설립해 새로운 도전에 나섰다.

이종문 회장이 김대중 대통령을 처음 만난 것은 1998년 6월, 김 대통령이 취임 후 미국을 국빈방문했을 때였다. 일정의 막바지에 이르러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김 대통령은 실리콘 밸리에 있는 세계적인 기업들을 차례로 방문하며 한국 기업과의 전략적 기술제휴와 투자 확대를 요청했다.
이종문 회장이 김대중 대통령에게 야후의 공동설립자인 제리 양을 소개하면서 우리도 잘만하면 이런 친구들을 500명 만들 수 있습니다.”(3)라는 말은 김 대통령의 관심을 끌었다.

김대중 대통령이 한국으로 돌아간 후, 이종문 암벡스 벤처그룹 회장은 스탠퍼드 대학에 200만 달러를 출연해 국내 벤처인들을 위한 교육프로그램으로 SEIT(Strategy and Entrepreneurship in the IT industry·IT산업의 경영전략과 기업가 정신) 과정을 개설했다. 재미교포 자녀들을 위한 장학사업을 하고 미국과 한국의 주요대학과 IT 관련 프로그램, 병원, 사회봉사기관 등에 지속해서 기부하는 등 한국 관련 단체에 기부한 금액은 2500만 달러에 달했다. 김대중 대통령은 한·미 간 교류확대에 공헌한 이종문 회장에게 민간인에게 주는 최고의 훈장인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수여했다.

여러 공익사업을 통해 미국사회에서 존경받는 기업가의 반열에 오른 그는 2005년 5월, 아시아소사이어티의 '올해의 인물'로 선정된 자리에서 모든 재산을 사회에 환원한다고 밝히고 전 재산을 맡겨 재단을 설립했다.
창업주도 중요하지만, 회사에 청춘을 바친 종업원들은 더욱 중요합니다. 종업원과 사회의 도움으로 일구어낸 재산을 자식들에게 고스란히 넘겨주는 것은 경영자로서 부끄럽고 치사한 행동입니다.”(4)

1998년 이후 벤처 재정전문가로 변신한 이 회장은 젊은 동포 사업가들에게 적지 않은 돈을 투자했다. 일부는 수익으로 돌아왔지만, 상당수는 실패했다. 이종문 회장은 실패를 실패로만 보지 않는 곳에서 벤처는 무한한 가능성으로 깨어난다고 말하고 있다.

(1)인용 -「美한인 땀과 꿈의 100년 – 암벡스벤처 이종문 회장」 『한국일보』 2003.2.25.
(2)인용 -「미 최우량기업 DMS사 이종문 회장(세계속의 한국인:3)」 『서울신문』 1995.12.11.
(3)인용 -「(와이드 인터뷰) 암벡스그룹 이종문 회장」 『디지털 타임즈』 2000.4.26.
(4)인용 -「(클로즈업) 전재산 사회 환원 이종문 美 암벡스 회장」 『동아일보』 2005.6.6.
참고자료
참고자료
  • 「미 최우량기업 DMS사 이종문 회장(세계속의 한국인:3)」 『서울신문』 1995.12.11.
  • 「김대통령 방미 실리콘밸리 '현장체험'」 『중앙일보』 1998.6.13.
  • 「金 대통령 訪美­샌프란시스코 방문」 『서울신문』 1998.6.13.
  • 「국제적 투자가 李鍾文 암벡스 회장」 『문화일보』 1999.12.7.
  • 「암벡스 벤처 이종문 회장 강연」 『뉴욕 중앙일보』 2001.3.21.
  • 「이종문 암벡스 회장 KAIST에서 '기업가정신' 특강」 『한국경제』 2002.10.8.
  • 「美한인 땀과 꿈의 100년 <9>실리콘밸리의 한인들」 『한국일보』 2003.2.25.
  • 「세계韓商을 찾아서 (19) 실리콘밸리/이종문 암벡스그룹회장」
  • 『매일경제』 2003.6.29.
  • 「이종문회장 기금 토대로 시작」 『샌프란시스코 중앙일보』 2003.10.2.
  • 「나눔으로 빛나는 아메리칸 드림」 『머니투데이』 2004.11.3.
  • 「(커버스토리) 이종문 회장 인터뷰」 『뉴욕 중앙일보』 2005.5.28.
  • 「(클로즈업) 전재산 사회 환원 이종문 美 암벡스 회장」 『동아일보』 2005.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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