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한만남
외규장각 의궤의 반환, 프랑수와 미테랑 (Francois Maurice Adrien Marie Mitterrand)
관련정보
관련정보가 없습니다.
|
|||||||
이어지는 만남하지만, 정상회담은 무거운 분위기에서 출발했다. 회담 직전 미테랑 대통령이 구토 증세를 보였던 것이다. 걱정스러운 얼굴로 미테랑 대통령을 바라보던 김영삼 대통령이 먼저 말을 꺼냈다. “우리 국민은 외규장각 도서를 우리나라에서 보게 되길 희망하고 있습니다.”(1) 당시 한국에서는 1886년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이 강화도 외규장각에서 가져간 고문서들이 돌아올 수 있을지가 초미의 관심사였다. 우리 정부 또한 외규장각 고문서를 돌려받기 위해 1989년부터 외교적 노력을 기울여왔다. 안색이 창백한 미테랑 대통령은 심사숙고하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이런 요청이 처음은 아닙니다. 절친한 친구인 그리스의 문화부장관이 나를 찾아와 물건을 돌려달라고 해서 아주 난처했었고, 그리스 수상이 나를 만났을 때도 옛 그리스 유물들을 임대해 달라고 했는데 응하지 않았습니다.”(2) 말을 아끼던 미테랑 대통령은 단호하게 말을 이어갔다. “유독 한국에 대해서만은… 이번에 응한 것….” (2) 미테랑 대통령의 갑작스러운 동의에 김영삼 대통령은 진심으로 사의를 표했다. 이에 미테랑 대통령은 “우선 상징적인 의미로 외규장각 고문서 중 두 권을 한국 측에 미리 반환할 방침”(3)이라고 답변했다. 안색은 여전히 창백한 편이었다. 다음 날인 9월 15일, 미테랑 대통령은 청와대로 김영삼 대통령을 방문해 외규장각 고문서 중 한 권인 「휘경원원소도감의궤(徽慶園園所都鑑儀軌)」 상권을 직접 전달했다. 그러면서 “외무장관에게 나머지 도서들도 어떤 방법으로 전달할 것인가 등을 협의하게 하겠다”(4)고 약속했다. 그런데 의궤 한 권이 한국에 전달되기까지 프랑스 쪽에서는 크고 작은 파란이 있었다. 우선, 총리실과 도서 소장기관인 국립도서관 쪽이 반대하고 나섰다. 다른 나라들까지 연쇄적으로 문화재 반환 요구를 해올 것이라고 우려했다. 그러다 보니, 방한의 상징적인 의미로 외규장각 고문서 2권을 비행기에 싣고 오려던 미테랑 대통령의 계획은 무산되고 말았다. 에어프랑스 편으로 긴급 공수된 외규장각 도서도 박물관 여직원이 껴안고 내놓지 않아 프랑스 정부의 애를 먹였다. 초조해진 대사관 직원들과 대사까지 나서서 길고 긴 설득작업을 벌여야 했다. 우여곡절 끝에 한국의 품으로 돌아온 한 권의 외규장각 의궤! 프랑스 국립도서관 사서로 근무하던 역사학자 박병선 박사가 1975년에 베르사유 별관 창고에서 금속활자본인 직지심체요절과 외규장각 의궤를 발견해 세상에 알린지 18년만의 일이었다. 이후 유럽순방에 나선 김영삼 대통령은 1995년 3월 5일 첫 순방국으로 프랑스를 방문, 미테랑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갖고 한반도를 비롯한 국제정세 및 양국 간 우호협력 확대 방안을 협의하며 양국의 관계를 공고히 다져나갔다. 소르본 대학은 김영삼 대통령에게 명예박사학위를 수여했다. 이는 700년 역사의 소르본 대학이 국가원수에게 최초로 수여한 명예박사 학위였다. 이처럼 한국과 프랑스는 교류를 확대하며 양국관계를 한 차원 높은 단계로 끌어올렸다. 하지만, 외규장각 의궤는 18년이 흘러 2011년 4월에야 한국인의 품으로 돌아왔다. 현재는 297권 전권에 대해 5년 단위 갱신이 가능한 일괄대여 방식으로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 중이다. 미테랑 대통령은 자신의 약속이 이행되는 걸 지켜보지 못한 채, 1996년 1월 8일 79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1)인용 -「“김 대통령 민주화투쟁-개혁에 경의”/미테랑 대통령 방한 첫 날 이모저모」 『세계일보』 1993.9.15. (2)인용 및 재구성 - 「도서반환 힘든 결정 강조/프랑스 대통령 방한 이모저모」『한겨레』 1993.9.15. (3)인용 -「파리 외규장각 도서 반환 합의/김 대통령-미테랑 회담」 『서울신문』 1993.9.15. (4)인용 -「고서 1권 김 대통령에 전달/미테랑 대통령」 『세계일보』 1993.9.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