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의 밀사 '헐버트(Homer B. Hulbert)'

‘지금은 자신의 역사가 종말을 고하는 모습을 목격하고 있지만 장차 이 민족의 정기가 어둠에서 깨어나면 잠이란 죽음의 모습이기는 하나 죽음 그 자체는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게 될 대한제국 국민에게 ...’
헐버트의 저서 『대한 제국 멸망사』 에 수록된 헌사 중에서(1)


1949년 8월 2일 오후 3시 30분경 서울 세종로 중앙청에서 국무회의 중이던 이승만 대통령에게 급한 전갈이 왔다. 헐버트 박사가 위독하다는 것이다. 이승만 대통령은 국무회의를 중단하고 헐버트 박사가 입원한 청량리 위생병원으로 달려갔다.
헐버트 박사는 그 옛날 함께 독립운동을 했던 이승만 대통령을 보자 떨리는 손을 내밀었다. “하루바삐 건강을 회복하셔서 전 민족의 환영을 받아달라”(2)는 이 대통령의 말에 헐버트 박사는 말없이 눈물만 흘렸다.

 

호머 헐버트, 그는 대한제국의 국권 회복을 위해 일제에 맞서 싸우다 강제추방까지 당했던 미국인 독립운동가였다. 이승만 대통령의 국빈 초청으로 신생 대한민국의 광복절 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1949년 7월 29일 인천항에 도착한 헐버트 박사는 그만 여독을 이기지 못하고 병석에 눕고 말았다. 

 

헐버트 박사가 이 땅에 첫발을 디딘 것은 그의 나이 23세 되던 1886년.
고종황제가 세운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국립학교 ‘육영공원’의 영어교사로 부임한 그는 한글의 우수성과 독특한 한국 문화에 매료되었다. 1891년 최초의 순 한글 교과서인 ‘사민필지’를 만든 이도, 최초로 한글의 띄어쓰기를 제안한 이도, 구전으로만 전해오던 아리랑을 처음으로 채보하여 세계에 소개한 이도 헐버트였다.
이 무렵, 조선이 일본제국으로부터 노골적인 위협을 받고 있는 것을 알게 된  헐버트는 조선의 정치, 외교문제에 관심을 두게 된다. 1895년 일제가 명성황후를 시해하는 만행을 저지르자 헐버트는 고종의 불침번을 자처했다. 일제가 미국사람을 어쩌지는 못할 거라는 생각에서였다. 고종은 그런 헐버트를 무척 신뢰했다.

 

1905년 10월 20일 고종은 국가의 존폐가 걸린 임무를 헐버트에게 맡겼다. 일제가 대한제국의 주권을 위협하고 있음을 미국정부에 알려 도움을 요청하는 일이었다. 1882년 조선과 미국 사이에 체결된 조미수호통상조약에는 제3국이 조선과 미국에  피해를 줄 경우 서로 돕는다는 약속이 들어있었다. 그러나 미국의 태도는 고종의 기대와는 전혀 달랐다. 그때 미국은 일본과 태프트 가쓰라 밀약을 체결하고 미국은 필리핀을, 일본은 한국을 차지하기로 합의를 끝낸 상황이었다. 헐버트가 루즈벨트 대통령을 만나기 위해 동분서주 하는 사이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미국 정부는 이제는 고종의 친서가 효력이 없다며 외면했다. 고종은 미국에 있는 헐버트에게 전보를 통해 을사늑약이 일본의 무력으로 이뤄졌으며 자신은 서명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렸다. 헐버트는 미국 정부를 공개적으로 맹비난했다. 

 

1907년 7월, 헐버트는 만국평화회의가 열린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이준, 이상설, 이위종 3명의 특사를 도와 국제사회에 을사늑약의 불법성을 폭로하고 한국 독립의 정당성을 호소하는데 필사적으로 매달렸다. 결국, 이 일로 일제의 강제퇴거명령을 받아 미국으로 돌아간 헐버트는 1945년 해방을 맞을 때까지 조선의 독립을 위한 기고와 강연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헐버트는 국권 회복운동 기간에 일제에 항거하며 한국인이 할 수 없는 일을 한 독립 운동가였고 조선의 젊은이들에게 미래에 대한 꿈과 희망을 불어넣은 교육자였으며 수많은 저술로 한국의 역사와 문화를 소개한 언론인이자 역사학자였다.
그는 그토록 보고 싶어 했던 대한민국 광복절 행사를 끝내 보지 못하고 1949년 8월 5일 오후 12시 25분 86세의 일기로 영원히 잠들었다. 그의 영결식은 대한민국 최초의 사회장으로 거행됐으며 유언(3)에 따라 미국이 아닌 양화진 외국인 묘지에 안치되었다. 1950년 3월 1일 우리 정부는 호머 헐버트 박사의 공로를 기려 외국인 최초로 대한민국 최고의 훈장인 건국훈장 태극장을 추서하였다.

  • 참고
  • 호머 헐버트. 『대한제국멸망사』. 집문당. 1999
    「헐벗 박사 입국」. 『경향신문』, 1949. 7. 31
    「국빈 헐벗 박사 중태 이대통령과 병석에서 극적대면」. 『경향신문』, 1949. 8. 5
    「대한민국정부수립 1주년 기념식」. 『경향신문』. 1949. 8. 7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사랑한 '헐버트(Homer B. Hulbert)'」. 『한겨레저널』. 2012. 10. 16
    「국빈 “헐벗” 박사 급서 5일 12시 25분 제 2고향 서울에서」. 『경향신문』. 1949. 8.7
    「일생 한국만을 위한 헐벌박사의 모습」. 『경향신문』. 1949. 8. 8
    「불멸의 한국은인 헐벗박사 명복을 기원」. 『동아일보』. 1949. 8. 11

(1) [원문] <Homer Hulbert, The Passing Of Korea, New York: Doubleday, Page & Co., 1906> Dedicated / TO HIS MAJESTY THE EMPEROR OF KOREA AS A TOKEN OF HIGH ESTEEM AND A PLEDGE OF UNWAVERING ALLEGIANCE, AT A TIME WHEN CALUMNY HAS DONE ITS WORST AND JUSTICE HAS SUFFERED AN ECLIPSE AND TO THE KOREAN PEOPLE WHO ARE NOW WITNESSING THE PASSING OF OLD KOREA TO GIVE PLACE TO A NEW, WHEN THE SPIRIT OF THE NATION, QUICKENED BY THE TOUCH OF FIRE, SHALL HAVE PROVED THAT THOUGH "SLEEP IS THE IMAGE OF DEATH" IT IS NOT DEATH ITSELF

호머 헐버트. 『대한제국멸망사』. 집문당. 1999

헌사 / 비방(誹謗)이 그 극에 이르고 정의(正義)가 점차 사라지는 때에 나의 지극한 존경의 표시와 변함없는 충성의 맹세로서 대한제국의 황제 폐하에게 그리고 지금은 자신의 역사가 그 종말을 고하는 모습을 목격하고 있지만, 장차 이 민족의 정기(精氣)가 어둠에서 깨어나면 '잠이란 죽음의 기상'(假像)이기는 하나' 죽음 그 자체는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게 될 대한제국의 국민에게 이 책을 드립니다.
(2) 인용 - 「국빈 헐박사 중태 이대통령과 병석에서 극적대면」. 『경향신문』, 1949. 8. 5

(3)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 www.yanghwajin.net 헐버트 선교사의 비문 “나는 웨스트민스터 성당보다도 한국 땅에 묻히기 원하노라.” “I would rather be buried in Korea than in Westminster Abbey.” 헐버트 박사가 평소에 자주 말하고 유언장에도 남긴 이 내용은 한국인에게 오랫동안 회자되기도 한 유명한 유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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