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한만남

한국인 최초 노벨상 후보자, ‘이태규’ 박사

한국인 최초 노벨상 후보자, ‘이태규’ 박사

관련정보 리-아이링 이론
고 이태규 박사 국립묘지 안장안
이태규 박사(과학원 명예교수) 예우문제에 대한 보고
영예수여(미합중국 유타대학교 명예교수 이태규)
제4회 국무회의록-체미중인 이태규 박사는 귀국하여 국내에서 계속 연구토록 조치를 취하라
제52회 국무회의 안건-고 이태규 박사 국립묘지 안장안
박정희 대통령 이태규 박사 접견
김종필 국무총리 이태규 학술원위원에 국민훈장 무궁화장 수여
김종필 국무총리 이태규 학술원위원에 국민훈장 무궁화장 수여
대한뉴스 제883호-이런일 저런일(한국과학원 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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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지는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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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도 없지요, 희망도 없지요, 피는 끓지요, 자포자기하기에 십상인
어두운 시대였지요. 곰곰이 생각하니까, 역시 그 길밖에 없었어요.
힘을 길러놓고 나라 찾는 날을 기다리자. 그래서 화학도가 된 겁니다."
- 이태규 박사 인터뷰 중에서, 『동아일보』, 1964.9.26.

1964년 9월 20일, 금의환향한 이태규 박사는 발전한 고국의 모습에 감개무량한 표정이었다. 그가 미국으로 건너간 것은 1948년 9월. 그 사이 한국전쟁이 터지면서 2년 예정으로 유타대학 교환교수로 떠난 게 그만 16년이 되고 말았다. 하지만 떠나있어도 이태규 박사는 1960년 빈에서 열린 ‘국제원자력회의’에 한국 수석대표로 참석하고, 인재들을 초청해 한국 화학계를 이끌 탁월한 제자로 길러내며 고국의 과학 발전을 위해 노력했다. ‘리-아이링 이론(Ree-Eyring Theory)’으로 알려진 비뉴턴 유동에 대한 논문과 촉매 반응 및 반응속도론, 액체 이론, 유변학(리올로지) 등 여러 분야에 걸친 연구로 학계의 주목을 받으며 한국 과학의 위상을 높이기도 했다. 16년 만의 고국 방문 일정도 학술강연회와 시민을 위한 강연회로 가득 채운 상태였다.

1964년 9월 25일 오전, 일정 중에 청와대로 박정희 대통령을 예방한 박사는 화사한 갈색 넥타이 매무시를 단정히 고치면서 말했다.
“이 나라에도 희망이 있습니다. 학생들의 탐구욕, 세계일류학자가 들려주는 어려운 강연을 끝까지 듣고 이해하려는 그 강인한 탐구욕에 머리가 수그러졌습니다. 조국의 내일은 밝습니다.”(1)
박사의 말에 고무된 박정희 대통령은 박사의 귀국 의사를 은근히 종용하기 시작했다. 경제발전을 위해서는 과학기술 발전이 필수적이라는 걸 절감했기 때문이었다.
“그들을 잘 키우려면 박사 같은 분들의 뒷받침이 꼭 필요합니다.”(2)
이에 이태규 박사는 “국가에서 필요하다면 어떤 일도 하겠다.”는 의사를 분명히 밝히며, 다만 외국에 나가 있는 인재들을 불러들이려면 사회적인 지원과 연구를 위한 체계적이고 종합적인 시설과 ‘잡(Job)’이 필요하다고 설명했다.(1) “현저한 발전을 이룬 우리나라 화학공업계를 제 눈으로 보고 싶다”(3)는 포부도 밝혔다. 이처럼 과학입국을 꿈꾼 대통령과 ‘과학 하는 백성이라야 산다.’고 믿었던 과학자의 만남은 짧지만, 서로에게 깊은 인상을 남기며 끝났다.

미국으로 돌아간 이태규 박사는 한국의 과학 발달을 위한 일에 힘을 보탰다. 1966년 10월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초대 소장을 지낸 최형섭 박사가 해외 한국 과학자의 귀국 종용을 목적으로 미국에 갔을 때에는 유타대학에 있는 한국인 유학생과 교직원 560명에게 헌신적으로 고국의 연구 성과를 소개하고 과학발전을 위한 귀국을 호소했다.

일제 강점기 한국인으로는 최초로 일본에서 이학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끊임없는 호기심과 한결같은 성실함으로 학문의 길을 닦은 이태규 박사는 1969년 우리나라 최초로 노벨상 후보에 오르며 세계적인 이론학자로 발돋움했다. 그 뒤, 한국과학기술연구원 교수로 부임(1973년)한 그는 삶을 통해 학문하는 이의 행복과 보람과 가치를 후학들에게 보여주며 1992년 작고할 때까지 종신 석좌교수를 역임했다.

과학자로서 국가의 명예를 드높이고 국내 과학발전의 초석을 닦은 공적을 인정받은 이태규 박사는 이례적으로 서울국립묘지(국가유공자 제2 묘역)에 안장되는 최초의 과학자가 되었다. 현재 서울국립과학관 4층에는 박사의 업적을 소개하는 코너가 마련되어 있다.

(1)기사에 실린 이태규 박사의 인터뷰 내용 중 일부를 인용 대통령과 나눈 대화처럼 재구성한 것입니다. 「인터뷰: 과학 하는 백성이라야 산다」 『동아일보』 1964.9.26.
(2)박정희 대통령의 말은 당시 외국에 머물고 있는 과학자들을 국내로 불러들이려고 한 대통령의 노력을 토대로 창작한 것입니다.
(3)기사에 실린 이태규 박사의 인터뷰 내용 중 일부를 인용 대통령과 나눈 대화처럼 재구성한 것입니다. 「국제물리화학계 거성 이태규박사 귀국 고국 떠난지 16년」 『동아일보』 1964.9.22.
참고자료
참고자료
  • 「세계과학계의 선진 이태규 박사를 맞으며」 『동아일보』 1964.9.17.
  • 「국제물리화학계 거성 이태규박사 귀국 고국 떠난지 16년」 『동아일보』 1964.9.22.
  • 「인터뷰: 과학 하는 백성이라야 산다」 『동아일보』 1964.9.26.
  • 「내가 겪은 20세기 (57) 이태규 박사」 『경향신문』 1973.9.15.
  • 「최형섭 칼럼: 그들은 조국을 향해 서 있다」 『동아일보』 1966.1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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