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한만남
아프리카와 맺은 평화의 약속, 오마르 봉고(El Hadj Omar Bongo Ondimba)
관련정보
비동맹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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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지는 만남관련인물이 없습니다. 다음날, 가봉 공화국 봉고 대통령은 부인과 6명의 자녀와 함께 12시 15분 전용기편으로 김포공항에 도착했다. 봉고 대통령은 도착성명을 통해 “본인의 이번 방한은 우리 양국 국민이 한국의 통일을 쉽게 하는 방법과 수단을 추구하는 데 있어서 특별한 계기가 될 것”이라고 말하고 “이번 방한기간 동안에 이루어질 협의를 통해 우리 양국 간의 공동이익이 더욱 증진될 수 있으리라 믿어 마지않는다”(1)고 밝혔다. 공항 영접식이 끝나고 김포가도를 거쳐 숙소인 조선호텔까지 카퍼레이드를 하는 동안 중심가에선 색종이 약 30여 가마가 뿌려져 하늘을 뒤덮었다. 김포가도와 제2한강교, 신촌로터리, 시청 앞 연도에는 수십만 시민들이 손을 흔들며 봉고 대통령 일행을 열렬히 환영했다. 박 대통령은 숙소인 조선호텔까지 동행했다. 국빈 방한 전까지만 해도 봉고 대통령이 누구인지 아는 사람은 드물었다. 가봉과 봉고는 뒤바뀌기 일쑤였다. 1962년 우리나라와 국교를 맺었지만, 실질적인 협력관계는 미미했다. 이처럼 낯선 아프리카 먼 나라의 대통령을 국빈 초청해 전무후무한 환대를 하게 된 것은 냉전 시대에 아프리카가 차지하고 있는 외교적 영향력 때문이었다. 2차대전 후 아시아, 아프리카, 중남미의 신생독립국들이 대거 UN에 가입하면서 제3 세력권이 주축이 된 비동맹회의를 결성해 UN 안건처리의 새로운 핵심으로 떠올랐다. 이들 제3 세력권의 과반수를 차지하고 있는 대륙이 아프리카였다. 북한은 모든 공산정권과 외교관계를 맺었고 다음으로 비동맹 국가들에게 접근하자 남한은 커다란 위기감을 느꼈다. 미국과 특수한 동맹 관계에 있는 우리나라는 비동맹회의와 어려움을 겪었다. 철저한 반공주의에 입각한 미국은 중립주의마저 부도덕하게 보는 관념이 팽배해 있었기 때문이다. 급기야 북한은 가봉 공화국과도 국교를 맺었다. UN에서 일관되게 우리나라를 지지하던 가봉 공화국이었다. 치열한 외교전 끝에 가봉공화국 봉고 대통령의 국빈 방한이 성사되자 북한은 연일 반대의 목소리를 높였다. 이를 무릅쓰고 초청에 응한 봉고 대통령이었다. 우리 정부는 외국 국가원수에게 할 수 있는 최고의 영접으로 화답했다. 한국·가봉 정상회담에서 두 정상은 시종 정중하면서도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진행됐다. 박정희 대통령은 “봉고 대통령은 과거 한반도의 평화 정착과 평화적 통일을 위해 노력하고 있는 대한민국의 입장을 지원해주고 협조를 아끼지 않은 우리의 진정한 벗”(2)이라고 말하고 우리 정부의 평화통일 정책을 설명했다. 봉고 대통령은 박 대통령의 말에 공감을 표시하며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모든 나라가 대한민국 정부와 긴밀히 협조해야 한다”(3)는 견해를 뚜렷이 밝혔다. 방한 일정의 마지막 날, 한국과 가봉은 정상회담의 성과를 담은 공동성명을 통해 가봉공화국 대통령은 대한민국 입장에 대한 유엔에서의 계속적인 지지를 재천명했다. 가봉공화국대통령은 대한민국 대통령에게 가봉을 공식 방문하도록 초청하였으며 박 대통령은 이 초청을 기꺼이 수락했다. (1)인용 -「뜨거운 환영 속 봉고대통령 입경」 『경향신문』1975.7.5. (2)인용 -「한국·가봉 제1차 정상회담」 『동아일보 』1975.7.5. (3)인용 -「우호협력 강화합의」 『동아일보』1975.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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