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대통령

제 5대~제 9대 대통령 (1962년 3월~1979년 9월)

생가 이야기

1917년 경상북도 구미시의 생가에서 태어나 1937년 대구사범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이곳에 살았다.

생가전경
유년시절

박정희 대통령은 태어나 1937년 대구사범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생가에서 살았으며, 생가에 대해 쓴 [나의 소년 시절]에 의하면 '이 집은 6·25동란 당시까지도 옛 모습 그대로였으나 6·25 때 파괴된 것을 사랑채만 옛 모습으로 복구하고 안채는 초가로 가건물을 백형이 지었다가 5·16 후 지금 있는 안채를 다시 건립하였다. 지금 있는 사랑채 큰 방은 내가 이 세상에 처음으로 고고의 소리를 내면서 태어난 산실이다' 라고 한다.

[출처 박정희 ≪나의 소년 시절≫ 월간조선, 1984]

생가위치

경상북도 구미시 박정희로 107

찾아가는길

박정희 대통령은 1917년 음력 9월 30일 경상북도 선산군 구미면 상모리(현 경상북도 구미시 상모동)의 금오산 자락에서 대한제국 말기에 효력부위와 사과를 지낸 아버지 고령박씨 박성빈씨와 어머니 수원백씨 백남의씨 사이에서 5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생가현황

건립 당시 초가였던 안채는 1964년 현재의 모습으로 개축되었으며, 생가 내에는 안채(관리사) 및 사랑채(초가)와 1979년에 설치한 추모관(분향소)이 있다.

[생가 안내판 中 발췌]

파노라마

생가내부


의상갤러리

박정희 대통령

육영수 여사


식사이야기

막걸리 마시며 넘은 보릿고개


박정희 대통령에게 막걸리는 술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

 

오후 5시, 보좌관 사무실의 전화벨이 울렸다. 대통령이었다. “보좌관들 다 있어? 식사 같이해.”(1) 한 시간 뒤, 식당에 들어서던 보좌관들은 막걸리 통을 발견하고 낮은 한숨을 토했다. ‘역시, 오늘도 막걸리구나.’(2) 박 대통령은 직원들과 저녁을 할 때면 항상 막걸리를 반주로 삼았다. 술의 종류가 바뀌는 날은 거의 없었다. 직원들은 막걸리에 질릴 지경이었지만, 대통령의 막걸리 사랑은 변하지 않았다.

 

하루는 외부 행사를 마치고 취재기자들이 모여 맥주를 마시자 “한국 사람들은 풋고추에 된장을 찍어 막걸리를 마셔야 한국인의 체취와 멋을 느낄 수 있을 것”(3)이라고 하면서 막걸리를 가져오도록 지시했다. 박정희 대통령의 비서실장을 지낸 김정렴씨는 “박정희 대통령에게 막걸리는 술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 농촌에서 자란 박정희 대통령은 막걸리가 허기를 달래주는 음식이라는 것을 잘 알았다.”(4)라고 말한다.
하지만, 예외는 있었다. 과거, 생사고락을 같이했던 지인들을 청와대로 부를 때는 불고기에 항상 소주나 정종을 곁들이며 격의 없는 대화를 나눴다는 얘기다.

박정희

“입맛은 소박하고 털털했지만, 식사량은 많지 않았다. 대통령의 메뉴라고 하기에는 너무 소박할 정도로”

 

박 대통령은 술자리에 앉으면 버릇처럼 앞에 놓인 젓가락, 술잔, 재떨이 등을 반듯하고 가지런하게 다시 놓았다. 입맛은 소박하고 털털했지만, 식사량은 많지 않았다. 대통령의 메뉴라고 하기에는 너무 소박할 정도로 식탁이 차려졌는데 점심에는 칼국수, 아침과 저녁에는 된장찌개, 풋고추, 고추장, 멸치조림이 단골 기본메뉴였다. 해물 된장찌개를 특히 좋아한 박 대통령은 두부를 반드시 넣을 것을 주문했다.

 

당시의 청와대 요리사, 손성실 씨는 "박정희 대통령은 짜고 칼칼한 음식을 좋아하셨어요. 된장과 고추장을 섞어 비빈 비름나물에 고소한 생선전, 소시지 반찬도 즐기셨어요.“(5)라고 전한다. 새마을 운동 현장 시찰 때는 막걸리와 새참상을 따로 준비했다.

 

1960년대 중반부터 쌀 생산량이 점점 부족해지자 정부는 쌀 소비를 낮추기 위해 혼분식 장려에 나섰고 1966년 쌀막걸리 제조를 전면 금지했다.


1970년부터는 일주일에 두 번, 수요일과 토요일에 쌀을 먹지 않는 무미일(無米日)을 시행하면서 박 대통령은 청와대 주방에도 무미일을 지키라고 지시했다. 이날은 음식점에서도 쌀밥을 판매할 수 없었고 학교에서는 담임 교사가 혼분식을 지키는지 학생들의 도시락을 검사했다.

 

서울 명동에는 밀가루 음식을 파는 분식점들이 늘어갔다. 이 시기를 거치면서 우리나라 식생활은 크게 변했다. 분식으로 한 두 끼를 해결하는 것이 일상처럼 된 것이다. 그러는 사이 정부가 개발한 신품종 ‘통일벼’로 쌀생산량을 대폭 늘리면서 쌀의 자급자족이 가능해지기 시작했다. 제조를 금지한 지 14년 만에 쌀막걸리가 부활했고, 이는 그해 10대 뉴스에 포함됐다.
하지만, 사람들의 입맛이 밀가루 막걸리에 길들어 쌀막걸리는 과거의 영광을 되찾지는 못했다. 박정희 대통령도 막걸리 맛이 옛날 같지 않다면서 맥주를 섞어 마셨다.

 

혼분식 장려운동이 한창이던 시기에 미국, 서독, 에티오피아 등 해외 정상들의 방한이 줄을 이었다. 국제사회에서 북한과 경쟁해야 했던 우리나라는 외교력을 높이기 위해 범국민적 환영행사를 열어 국빈 대접을 했다.
영부인 육영수 여사는 각 대학 영양학 교수들로 구성된 위원회를 만들어 서양인의 입맛에 맞는 한식 메뉴를 정하는 일에서부터 청와대의 상징인 ‘봉황’과 ‘무궁화’가 그려진 청와대 전용 그릇과 신선로, 은수저까지 세세하게 챙기면서 과거 영부인과 다른 적극적인 모습을 보였다.
그렇게 안팎으로 심혈을 기울인 국빈 만찬에는 백반, 전복탕, 신선로, 약주, 겨자채, 김 튀각, 편육, 구절판, 불고기, 전유어, 샴페인, 잣박산, 강정, 사과, 홍삼차가 순서대로 차려졌다.

 

박 대통령은 1979년 6월, 미국 대통령으로서는 4번째 방한한 카터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을 마치고 승리의 술잔을 들었다. 미국의 시사 주간지 ‘뉴스위크’는 카터 대통령이 박 대통령의 주한미군 유지 요구를 수용한 것을 두고 ‘한국, 한판 이기다’라는 제목의 기사를 실었다.

 

농민에게 막걸리를 따라 주며 새마을 운동을 독려했던 박정희 대통령은 그 어떤 정치적 발전보다 경제발전이 먼저라는 판단 아래, 경제개발계획에 박차를 가했고 ‘한강의 기적’이라 불리는 경제 성장을 이뤄냈다.

 

(1) 인용 -「박정희 대통령과 술」『월간조선』 1985.4
(2) 인용 -「박정희 대통령과 술」『월간조선』 1985.4
(3) 인용 -「고 박대통령의 일상생활에 얽인 일화들」『매일경제』 1979.113
(4) 인용 - 송국건 『도대체 청와대에선 무슨 일이?』 네모북스 P252
(5) 인용 -「나물, 김치에 소시지 반찬...박정희 밥상 재현」『중앙일보』 2015. 5.18

참고자료
참고자료
  • 송국건 『도대체 청와대에선 무슨 일이?』 네모북스
  • 주영하 「식탁 위의 한국사」(주)휴머니스트 출판사
  • 「한국의 정서에 안긴 버드 여사」 『동아일보』 1966.11.2.
  • 「흥겨운 방한 이틀째」 『매일경제』 1967.3.4.
  • 「육여사 ‘메뉴’ 식기 장만에 바빠」 『매일경제』 1967.1.28.
  • 「서울 새 풍속도 <214> 명동(14)특색 잃어가는 식당」 『경향신문』 1971.8.11
  • 「1972년(3) 쌀 편식서의 일대변혁 식생활」 『경향신문』 1972.12.20
  • 「새해부터 절미확대」 『동아일보』 1972. 12.23
  • 「박대통령 마지막 하루」 『동아일보』 1979.10.27.
  • 「비화 제3공화국 <12>」 『동아일보』 1982.2.6.
  • 「무미일을 아시나요?」 『경향신문』 2012.1.27

만찬사진

청와대 식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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