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한만남
중동평화의 중재자, 요르단 국왕 ‘후세인 1세’ |
|||||||
이어지는 만남관련인물이 없습니다. 후세인 국왕은 2차 대전 이후 세계의 화약고로 등장한 중동의 한복판에서 탁월한 외교력으로 정치적 안정을 지켜온 중동평화의 버팀목이자 서방과 아랍국가들 사이의 대화창구로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요르단은 중동지역에서 유일하게 석유 한 방울 나지 않는 데다 지정학적으로 열세에 놓여있어 예로부터 외부의 침략이 많은 나라였다. 1952년 17세 어린 나이에 왕좌에 오른 그는 자국의 생존을 위해 수완을 발휘하며 복잡한 국제정세 속에서도 신망을 얻었다. 무엇보다 그는 부패하지 않은 왕가로 국민들에게 전폭적인 지지를 받고 있었다. 후세인 1세 국왕의 방한은 우리나라의 제3 세계 외교역량의 성장을 의미하기도 했다. 1970년대 중동건설붐을 타고 급격히 발전한 우리나라와 중동지역의 관계가 이제는 정치·외교적으로 대한민국의 입장을 한층 강화하여 기존의 우호 관계를 발전시키는 계기로 삼는다는 데 의의가 있었다. 그런데, 후세인 국왕의 방한은 세계를 경악시킨 하나의 사건으로 인해 그 의미가 더 커졌다. 후세인 국왕이 방한하기 9일 전 KAL기 피격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청와대에서 가진 한·요르단 정상회담에서 두 정상은 매우 진지한 분위기 속에서 세계정세 전반에 걸쳐 의견을 나누고 양국 간의 협력 범위를 더욱 넓히고자 하는데 의견을 같이했다. KAL기 피격사건과 관련해서는 소련의 만행을 비인도적인 것으로 규정하고 두 나라는 앞으로 국제사회에서 민간항공기가 안전한 운항을 할 수 있도록 예방책과 보장책을 마련하기 위해 함께 노력해 나가자는데도 뜻을 모았다. 이러한 양국의 합의는 한·요르단 공동성명에도 그대로 반영되었다. 특히 후세인 국왕은 “대한항공 747 민간여객기가 평화적인 운항 중에 소련전투기의 의도적인 미사일 공격을 받아 격추됨으로써 여러 나라 국적의 무고한 승객과 승무원들이 불시에 희생된 믿을 수 없는 참변 소식에 표현할 길 없는 충격과 분노를 느끼고 있다”고 말하고 한국정부와 국민, 그리고 희생자 유가족에게 조의를 표하면서 “우리는 전 세계와 함께 민간항공에 대해 이러한 행위를 자행할 권리를 주장하려는 어떠한 기도에 대해서도 강력히 항의한다”(1)고 천명했다. 후세인 국왕의 방한 기간 중인 9월 12일(한국시각 13일 오전 7시 25분), UN 안보리에서는 KAL기 격추사건에 대해 소련을 규탄하는 결의안 표결을 시작했다. 안보리 이사국 15개국 중 9개국의 지지를 받아야 했지만 찬성 9표의 확보가 불확실한 상황이었다. 그런데 유엔안보리의 비상임이사국이었던 요르단의 후세인 국왕이 적극적으로 한국을 지지하면서 대세가 기울었다. 결과는 찬성 9, 반대 2, 기권 4! 그러나 결의안은 소련의 거부권 행사로 부결되고 말았다. 중동지역의 반미성향과 반이스라엘 분위기를 고려해야 하고 동시에 친미적인 정치 입장을 취해온 후세인 국왕이 특정 지역문제에 깊이 개입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럼에도 소련의 만행을 규탄하는 일에 적극 나선 데 대해 전두환 대통령은 깊은 감사를 표했다. 전 대통령은 후세인 국왕 내외와 김포공항까지 동행하고 아쉬운 작별의 인사를 나누었다. 1급 조종사자격을 가진 후세인 국왕은 특별기 조종석에 앉아 직접 조종해 김포공항을 이륙했다. 후세인 국왕은 1999년 2월 7일 암투병 끝에 63세의 일기로 타계했다. 3일 전 미국에서 마지막으로 암치료를 받고 돌아가는 그를 위해 2대의 미국 제트 전투기들이 미국 영공을 벗어날 때까지 국왕의 전용기를 호위했고 요르단으로 돌아가는 길목마다 다른 나라의 공군기들도 똑같이 그를 경호해 주었었다. 그의 타계 소식에 세계 각국의 지도자와 정부는 깊은 애도와 함께 요르단 정부에 대한 지원을 약속했으며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도 일제히 애도의 성명을 발표했다. (1)인용 -「민항안전에 공동노력 한·요르단정상회담」 『경향신문』1983.9.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