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한만남

대통령이 된 한국전쟁 참전용사, ‘피델 발데스 라모스’

대통령이 된 한국전쟁 참전용사, ‘피델 발데스 라모스’

피델발데스라모스 사진1
피델발데스라모스 사진3
피델발데스라모스 사진4
피델발데스라모스 사진1
피델발데스라모스 사진3
피델발데스라모스 사진4
이어지는 만남
필리핀 역사상 가장 오랫동안 집권한 독재자 마르코스가 축출된 후 첫 민선 대통령으로 피델 발데스 라모스 전 국방장관이 선출되었다. 마르코스의 독재를 쓰러뜨리기 위해 마르코스의 후임 대통령에 오른 아키노 정권하에서 라모스 장관이 7차례나 군부 쿠데타 진압에 성공하면서 민주주의의 수호자로 국민의 지지를 받은 결과였다.
이듬해 우리나라에서는 김영삼 대통령의 문민정부가 출범했다. 김영삼 대통령은 취임 후 처음으로 맞이하는 국빈으로 피델 라모스 필리핀 대통령 내외를 공식초청했다.

1993년 5월 23일 오후 각료 6명과 55명의 기업인을 대동하고 필리핀항공 특별기편으로 방한한 라모스 대통령은 25일 아침, 국립묘지에 헌화하고 오전 10시 청와대에 도착했다. 김영삼 대통령은 부인 손명순 여사와 함께 영빈관 현관에서 라모스 대통령 내외를 맞아 반갑게 인사했다.
"각하의 이번 방한은 필리핀 대통령으로서는 사상 처음 있는 일이며 내가 대통령에 취임한 후 첫 번째 국가원수라는 점에서 뜻깊은 일입니다. 각하와 나는 필리핀과 한국국민들의 민주주의를 향한 열망에 의해 대통령으로 선출됐으며 우리는 민주주의 발전을 위한 역사적 소명을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소위 때 처음으로 한국전쟁에 참전해 자유를 지키기 위해 싸웠던 한국을 41년 만에 다시 와 경제적으로 성장하고 정치적 자유를 누리는 모습을 보고 커다란 성취감을 느낍니다. 이번 방한이 지역협력의 새 이정표가 되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1)
밝은 표정으로 화답하는 라모스 대통령은 오래된 기억의 한 장면을 떠올렸다.

'1952년 5월 21일 오전 7시 10분, 25세의 피델 라모스 소위는 필리핀 29대대 수색중대 제2소대를 이끌고 작전개시에 들어갔다. 강원도 연천 부근 에리(Eerie) 고지. 라모스 돌격대가 제3 벙커 안에 수류탄을 던져 넣었다. 적병이 모두 죽었으리라 생각한 라모스 소위는 벙커 입구로 다가갔다. 별안간 중공군 2명이 소총을 난사하며 뛰쳐나왔고 놀란 라모스 소위는 카빈총의 방아쇠를 당겼다. 중공군 3명이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라모스 돌격대는 벙커 7개를 완파한 뒤 단 1명의 손실도 없이 복귀했다.’ (2)

김영삼 대통령은 환영식장에서 라모스 대통령에게 무궁화 대훈장을 직접 수여한 뒤 회담을 진행했다. 양국 정상회담은 단독회담에 이어 확대회담으로 이어졌고 내내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1시간 20분 동안 진행됐다.
김 대통령은 우리의 신한국건설과 신경제정책에 관해 설명했고 라모스 대통령은 한국 등 아시아 신흥공업국을 모델로 한 ‘2000년의 필리핀’이라는 경제개발계획을 이야기했다. 한반도를 포함한 국제정세와 양국관계 증진방안 등 공동 관심사에 관해서도 폭넓게 논의한 양국원수는 특히, 한반도의 핵위기에 대해 깊이 있는 이야기를 나눴다.

당시 한반도는 북한 핵 문제로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안갯 속에 놓여있었다. 라모스 대통령 방한 기간 중 서울에서는 제26차 태평양경제협의회(PBEC) 총회가 열리고 있었고 북한의 참석이 최대 관심사였다. 하지만 강력한 참석 의사를 비춰왔던 북한은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문제를 둘러싼 긴장 고조로 끝내 참석하지 않았다.

양국 정상은 북한의 핵사찰 거부와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 결정이 아·태 지역 평화에 대한 위협일 뿐만 아니라 국제사회 전체에 대한 도전이 되고 있다는데 인식을 같이하고 북한 핵 문제 해결을 위해 협력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김영삼 대통령은 정상회담의 결과에 만족을 표하며 만찬사를 통해 “6·25 때 필리핀과 우방국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오늘과 같은 한국의 경제발전과 민주주의의 실현은 없었을 것이라고 말하고 앞으로 우리 양국은 우호와 유대를 더욱 공고히 함으로써 21세기 아시아 태평양시대의 주역이 되도록 노력하자고 강조했다. (3)

이듬해 김영삼 대통령은 필리핀을 방문하고 말라카냥 궁에서 피델 라모스 필리핀 대통령을 다시 만났다. 김영삼 대통령은 라모스 대통령으로부터 필리핀 최고의 자라 훈장을 받고 선물을 교환했다. 라모스 대통령은 두 나라는 자유를 위해 싸운 2차 세계대전과 한국전쟁을 통해 가까워지기 시작했다고 말했고 김 대통령은 참전하신 라모스 대통령과 7천여 필리핀 장병이 흘린 피와 땀은 오늘의 한국의 소중한 밑거름이 되었다”(4)고 답했다. 이번 만남을 계기로 양국은 필리핀 통신 시장 및 건설사업에 한국 기업이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군수 방산협력 양해각서를 체결하는 등 실질적인 경제협력의 범위를 확대하기 시작했다.

(1)인용 -「韓.比유사점 화제로 협력강화 다짐」 『연합뉴스』 1993.5.25
(2)인용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에리 고지와 DMZ」 『경향신문』 2012.3.21.
(3)인용 -「한·필리핀 정상회담 이모저모」 『서울신문』 1993.5.26.
(4)인용 -「김 대통령 3국순방」 『동아일보』 1994.11.11.
참고자료
참고자료
  • 「라모스 어제내한/내일 한·비 정상회담」 『경향신문』 1993.5.24.
  • 「韓.比유사점 화제로 협력강화 다짐」 『연합뉴스』 1993.5.25.
  • 「태평양 경제협 총회 이모저모」 『동아일보』 1993.5.25.
  • 「“북한핵 아태평화 위협”/한·비정상회담/평화해결 협력키로」『경향신문』 1993.5.26.
  • 「“역내발전에 모두 동참해야”/라모스 비 대통령 인터뷰」 『경향신문』 1993. 5.26.
  • 「한·필리핀 정상회담 이모저모」 『서울신문』 1993.5.26.
  • 「라모스비대통령「통치철학」본다/ 특별인터뷰」 『한국일보』 1994.6.24.
  • 「한·비 동반협력 확대/양국 외무합의」 『경향신문』 1994.5.17
  • 「김 대통령 3국순방」 『동아일보』 1994.11.11.

이 페이지에서 제공하는 정보에 의견이 있으시면 내용입력 후 제출하기를 눌러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