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한만남
‘영국 노블리스 오블리주의 상징’ 여왕 엘리자베스 2세 (Elizabeth 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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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지는 만남관련인물이 없습니다. 영국은 국빈 초청 횟수를 매년 2차례로 제한하고 그 자격까지 엄격한데 ‘민주주의에 공헌한 사람’으로 인정되어야 하는 것이 국빈의 조건이었다. 노 대통령은 첫 일정으로 세인트 조인스궁에서 가진 동포간담회를 빌어 “김대중 전 대통령이 인권지도자로서 명성이 있고, 북한 핵을 푸는 큰 방향을 잡은 게 공감을 얻어 명망이 있다”며 “저는 덕분에 대접을 잘 받는다”(1)라고 이번 국빈 방문의 공을 김대중 전 대통령에게 돌렸다. 12월 1일 노무현 대통령의 영국 국빈방문 공식 환영식은 근위병 교대식이 열리는 곳으로 유명한 '호스 가즈(Horse Guards)' 광장에서 시작됐다. 세간의 관심은 ‘대영제국’의 화려한 의전에 집중됐다. 엘리자베스 2세 여왕과 토니 블레어 총리 등이 참석한 가운데 노무현 대통령이 도착하자 공식 행사를 알리는 예포가 울리고 트럼펫 연주가 이어졌다. 노 대통령은 100명 규모의 화려한 의장대, 군악대, 기마대를 사열한 뒤 기병 대장의 안내로 엘리자베스 2세 여왕과 함께 왕실 마차를 타고 버킹엄궁으로 이동했다. 이날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은 외국 국가원수에게 수여가 가능한 영국 최고훈장인 GCB 대훈장을 노무현 대통령에게 서훈했으며, 노 대통령은 가까운 시일 안에 여왕이 한국을 다시 방문해 달라고 초청했다. 노무현 대통령은 왕실 주선으로 보수당의 마이클 하워드, 자민당의 찰스 케네디 당수 등 야당 지도자들과도 각각 면담하고 북한 핵 문제 등에 대한 영국 의회 차원의 협력을 요청했다. 여왕과 함께 한국군 참전용사회 대표를 접견한 노 대통령은 토니 블레어 영국 총리와 정상회담을 열어 금융 및 첨단 과학기술 분야에서의 협력 증진방안, 북한 핵 문제를 포함한 한반도 정세, 이라크 문제 등을 논의했다. 노무현 대통령은 영국 국빈 방문을 통해 북핵문제를 포함한 한반도 평화구축에 있어 EU의 중심국인 영국의 지지를 재확인하고자 했다. 이는 국제여론 주도국인 영국으로부터 북핵문제 해결과 북한의 변화, 개방, 개혁을 위한 적극적인 협력을 확보하고 한-EU 관계 강화를 위한 협력 기반을 확충한다는 뜻이 담겨 있었다. 노 대통령은 버킹엄궁에서 진행된 국빈만찬에서 다시 한번 최상의 영접을 받았다. 만찬은 3시간여 동안 진행됐다. 여왕은 만찬사에서 “한반도는 아직도 분단된 상태로 남아 있다”며 “한국민이 다시 한번 통일을 이룩해 평화를 누리면서 번영하는 날이 오기를 고대하고 있다”(2)고 말했다. 노 대통령은 답사를 통해 “한국전쟁에 모두 5만 7000명의 영국 젊은이들이 참전했다”며 “1990년대 말 우리가 경제위기에 직면했을 때 가장 먼저 투자사절단을 파견한 나라도 영국이었다”(3)고 양국 간 우의를 강조했다. 특히, 여왕은 자신이 즉위할 당시 한국은 전쟁 중이었으며 분단을 종식시키지 못한 그 끔찍한 전쟁에 참전하고 전몰한 모든 사람들을 기억한다며 한반도의 분단상황을 안타깝게 생각했다. 여왕은 전쟁의 참혹함을 책으로 배운 군주가 아니었다. 2차 대전에 참전해 전선에서 트럭을 운전하고 탄약을 운반하는 일을 하며 왕실의 노블리스 오블리주를 실천했던 그는 왕위 계승자로서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왕위 대관식을 치른 그곳에서 목숨이 다하는 날까지 영국과 국민을 위해 봉사하겠다고 신 앞에 맹세했었다. 군주의 책임이라는 무거운 짐을 짊어진 엘리자베스 2세로 다시 태어난 그가 50년이 지나 한반도의 평화를 기원하는 대목에서는 남다른 울림이 있었다.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은 1백년이 넘는 수교의 역사를 가진 한국과 영국의 관계는 어느 때보다도 공고하며 다변화되고 있다고 강조했다. 양국은 많은 국제문제에 대한 입장과 원칙에서 의견을 같이 하고 있음을 확인하고 진정한 친구이자 우방으로서 미래의 동반자 관계를 축복하며 잔을 들어 건배했다. (1)인용 -「노대통령 영국 첫 국빈방문…여왕 환영식」 『한겨레』2004.12.2. (2)인용 -「엘리자베스 2세 여왕 국빈만찬사」 2004.11.26. (3)인용 -「盧대통령 英국빈만찬 이모저모/왕실가족 140명 참석 환대」 『세계일보』2004.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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