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한만남

가깝고도 먼 나라 일본의 정치인 ‘고노 요헤이(河野洋平)’

가깝고도 먼 나라 일본의 정치인 ‘고노 요헤이(河野洋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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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와대 소식 - 고노 요헤이 일본 외무장관 접견 말씀
청와대 소식 - 고노 요헤이 일본 외무장관 접견 말씀
청와대 소식 - 고노 요헤이 일본 외무장관 접견 말씀
김대통령, [고노 요헤이] 일 외무장관 접견
김대통령, [고노 요헤이] 전 일본 외무대신 접견
(선물) 꽃 문양 실크 스카프(일본 하나에 모리 Hanae Mori 사)
(선물) 천연 쪽 염색 천으로 만든 벽걸이
(이명박) 인포그래픽-20120828 고노담화
김대중 대통령 고노 요헤이(河野洋平) 전 일본부총리겸 외무대신 접견
김대중 대통령 고노 요헤이(河野洋平) 전 일본부총리겸 외무대신 접견
김대중 대통령 고노 요헤이(河野洋平) 자민당 전 총재와 오찬
김대중 대통령 고노 요헤이(河野洋平) 자민당 전 총재와 오찬
김대중 대통령 고노 요헤이 일본 외상 접견
김대중 대통령 고노 요헤이 일본외상 접견 동양화 선물받음
고노 요헤이(河野洋平) 외상 접견(99.10.25)
고노 요헤이 일본 외상 접견(3.27)
고노 요헤이 일본 외상 접견(7.14)
청와대 소식 - 고노 요헤이 일본 외무장관 접견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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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물) 꽃 문양 실크 스카프(일본 하나에 모리 Hanae Mori 사)
(선물) 천연 쪽 염색 천으로 만든 벽걸이
(이명박) 인포그래픽-20120828 고노담화
김대중 대통령 고노 요헤이(河野洋平) 전 일본부총리겸 외무대신 접견
김대중 대통령 고노 요헤이(河野洋平) 전 일본부총리겸 외무대신 접견
김대중 대통령 고노 요헤이(河野洋平) 자민당 전 총재와 오찬
김대중 대통령 고노 요헤이(河野洋平) 자민당 전 총재와 오찬
김대중 대통령 고노 요헤이 일본 외상 접견
김대중 대통령 고노 요헤이 일본외상 접견 동양화 선물받음
고노 요헤이(河野洋平) 외상 접견(99.10.25)
고노 요헤이 일본 외상 접견(3.27)
고노 요헤이 일본 외상 접견(7.14)
이어지는 만남
"일본은 과거 한국에 일본의 가치관을 강요한 역사적 사실을 진지하게 직시하고
확실하게 반성해야 한다. 이 같은 사실이 반드시 전제돼야만
한국과 일본이 '진정한 친구'로서 상호 신뢰 관계를 구축할 수 있다"
- 고노 요헤이, 2013년 2월 14일 한.일 국제 포럼 초청 특별강연에서

일본을 국빈 방문한 김대중 대통령이 도쿄를 떠나기에 앞서, 1998년 10월 9일 영빈관에서 야당 n시절 자신을 직·간접적으로 도운 일본 내 친분 인사들과 만났다. 인사를 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난 김대중 대통령의 표정은 남다른 감회로 가득했다.
“여러분들이 그토록 걱정하고 목숨을 살리려고 했던 제가 죽지 않고 살아 대통령으로서 찾아뵙게 돼 감개가 무량합니다. 제가 대통령이 된 것은 인권과 대의를 위해 힘쓴 여러분의 승리입니다.(1)
대통령이 되어 돌아온 오랜 친구의 인사말에 일본 인사들의 가슴도 벅차올랐다. 정겨운 얼굴들을 일일이 둘러본 김대중 대통령은 감사의 마음을 담아 마지막 말을 덧붙였다.
“한국의 대통령으로서, 인간 김대중으로서 여러분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하여 저를 친구로 삼은 것이 자랑스럽고 보람된 것으로 느끼게 하겠습니다.”(2)
일본 인사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박수를 보냈다. 테러와 납치, 사형선고와 투옥, 망명, 가택연금이라는 온갖 고초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민주화운동을 전개하며 ‘인동초(忍冬草)’라 불린 친구이자 정치인에게 보내는 존경의 마음이었다.
고노 요헤이도 뜨거운 마음으로 박수를 보냈다. 고노 요헤이가 김대중 대통령을 처음 만난 건 1973년 어느 날의 일이었다. 당시 3선 중의원 의원으로 문부성 정무차관이었던 36세의 고노 요헤이는 ‘김대중’이라는 한국의 정치인이 도쿄의 그랜드팰리스 호텔에서 납치됐다는 소식을 들었다. 1970~80년대 평화·군축 운동을 했던 고 우쓰노미야 도쿠마 의원이 구명운동에 나섰다. 고노 요헤이는 총리 관저와 외무성을 쫓아다니며 사태의 심각성을 알렸다. 미국 정부를 통해 한국 정부에 압력을 넣어줄 것도 촉구했다. 이러한 노력에 힘입어 김대중 대통령은 납치 129시간 만에 서울 동교동 자택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지난했던 구명운동을 계기로 김대중 대통령과 가까워지기 시작한 고노 요헤이는 보수적인 자민당 내에서도 보기 드물게 진보적 성향을 보이며 야당과 인권문제에 깊은 관심을 보여 온 인물이었다. 2014년 아베 정권이 검증에 나서며 한일관계를 혼란에 빠뜨린 ‘고노 담화’도 고노 요헤이의 작품이다.
1993년 고노 요헤이는 일본군 위안부 동원의 강제성을 인정하고 일본의 '사과와 반성의 마음'을 밝히는 ‘고노 담화’를 발표했다. 종전 이후 일본이 사실상 처음으로 군 위안부에 대해 밝힌 사과의 입장이자, 1965년 한일협정 이후 지지부진했던 한일 양국의 과거사 재정립을 위한 노력의 첫걸음이었다. 나아가 고노 요헤이는 1998년 10월 8일 ‘21세기를 향한 새로운 한·일 파트너십 공동선언’이 발표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당시 ‘공동선언’은 조약과 같은 효력을 지니지는 않지만, 식민 지배에 대한 일본의 사죄를 문서화함으로써 20세기의 한일관계를 매듭짓고 21세기 양국 관계의 새로운 위상을 정립하는 기초가 되었다. 더불어 이 시기에 철옹성 같았던 한국의 일본문화 개방도 이루어졌다.

한국과 일본의 대등하고 상호 유익한 협력 관계를 위해 노력했던 김대중 대통령과 고노 요헤이! 2009년 8월, 김대중 대통령의 병세가 심각하다는 소식을 접한 고노 요헤이는 안타까운 마음을 감추지 못하며 한국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밝혔다.
“DJ는 한국 역사에서 가장 큰 시대를 열었고, 한국인들의 가슴에 자부심을 심어준 사람이다. 지금 한반도는 매우 중요한 시기다. 이럴 때 노벨 평화상을 받은 DJ가 한반도와 아시아, 그리고 젊은 사람들에게 전할 메시지가 많다. 병상에서 다시 벌떡 일어나 만날 날을 기대하고 있다.”(3)
하지만 36년 친구의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고노 요헤이는 오랜 친구와의 반가운 해후 대신, 2009년 8월 24일 김대중 대통령 영결식에 일본 조문단을 이끌고 방한해야 했다.

(1)인용 -「김 대통령 방일 親DJ 인사와 반가운 만남」 『경향신문』 1998.10.10.
(2)인용 -「“한반도 중요한 시기… DJ 필요해”」 『중앙일보』 2009.8.14.
(3)인용 -「DJ “우리는 세계의 한 영웅을 잃었다”」 『뉴데일리』 2009.6.26.
참고자료
참고자료
  • 「일 정신대 강제연행 인정/관방장관 공식담화」 『한국일보』 1993.8.5.
  • 「일 관방장관 담화문(전문)」 『세계일보』 1993.8.5.
  • 「한-일 공동선언 발표/20세기 갈등관계 매듭.. 의의」 『한국경제』 1998.10.8.
  • 「김 대통령 방일 親DJ 인사와 반가운 만남」 『경향신문』 1998.10.10.
  • 「(금주의 인물) 고노 요헤이 외상 내정자」 『매일경제』 1999.10.5.
  • 「“한반도 중요한 시기… DJ 필요해”」 『중앙일보』 2009.8.14.
  • 「일본 지성 깨운 ‘DJ 납치 사건’」 『한겨레』 2009.8.22.
  • 「올브라이트 고노 요헤이 직접 조문」 『매일경제』 2009.8.23.
  • 「고노 “일본 과거사 확실하게 반성해야 한다.”」 『서울신문』 2013.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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