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한만남

백성들이여 일어나라 ‘명성황후 공연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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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성황후 관람계획
명성황후 공연 관람 말씀자료
김대통령, 뮤지컬명성황후관람
노무현 대통령 명성황후 관람
김영삼 대통령 뮤지컬 명성황후 배우 접견
김영삼 대통령 김수환 추기경과 명성황후 관람
명성황후 공연 관람
명성황후 뮤지컬 관람(3.26)-여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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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성황후 공연 관람
명성황후 뮤지컬 관람(3.26)-여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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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5년 10월 8일 새벽, 경복궁을 습격한 일본의 자객들이 왕실에 난입해 조선 왕조의 국모 명성황후를 무참히 살해했다. 그리고 100년 후, 비운의 역사 속에 잠들어 있던 명성황후는 조선의 잔다르크로 되살아났다. 명성황후 시해 1백 주기를 맞아 국모로서의 역할과 면모를 재조명한 뮤지컬 '명성황후'가 초연되자 관객과 평단의 반응은 뜨거웠다.

4년간의 제작기간, 제작비 12억원을 들여 완성한 뮤지컬 명성황후는 국내에서 내로라하는 전문제작진과 화려한 출연진으로도 화제를 모으기에 충분했다. 뮤지컬 명성황후의 원작이 된 ‘여우 사냥’은 소설가 이문열씨의 첫 희곡작품으로 명성황후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제시했다. 명성황후를 풍전등화의 조국을 슬기롭게 지키고자 했던 ‘조선의 잔다르크’로 재창조한 것이다. 작가는 “국내는 물론 미국과 영국에서 1년 동안의 자료수집을 통해 명성황후가 악의적으로 왜곡됐다는 확신을 갖게 됐다.”(1)고 말해 공연의 기획단계부터 세간의 관심을 끌었다.

원작은 다시 한국예술종합학교 극작과 김광림 교수에 의해 대사 없이 노래로만 진행되는 새로운 뮤지컬 형식으로 각색됐다. 뮤지컬 음악에 처음으로 도전한 작곡가 김희갑, 작사가 양인자씨는 대중성과 클래식을 접목한 61곡의 뮤지컬 넘버를 창작해냈다. 무대 위에서 전개될 명성황후의 새로운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시각화된 것은 안무에서였다. 우리나라에서 뮤지컬이 활성화되는데 첫 시발점이 된 작품 ‘캣츠’에서 연기와 안무를 맡았던 서병구씨는 연극적인 요소와 조화를 이룬 춤으로 다양한 감정의 흐름을 배우들의 몸의 언어를 통해 극적으로 표현했다.
눈에 띄는 것은 이뿐만이 아니었다. 한국문양의 아름다움을 복원한 의상은 고증을 바탕으로 한 창작의 결과물로서 한국 뮤지컬의 격을 한 단계 올려놓았다는 평을 받았다.
연출을 맡은 윤호진씨는 “사극의 현대화와 세계화를 염두에 두고 기획했다”며 “빠른 무대 전개, 풍성한 볼거리, 다양한 정서적 층위를 통해 우리 뮤지컬의 새로운 지평을 열고자 한다.”(2)고 연출의 의도를 밝혔다.

연극계 일류의 재능들이 모이고 기업의 후원을 끌어들인 뮤지컬 명성황후는 규모에서나 수준에서나 모두 일류의 규격을 갖춘 무대를 만든다는 연출가 윤호진의 야심만만한 의지로 1995년 12월 30일 마침내 관객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명성황후 역에는 배우 윤석화씨가, 고종 역에는 영화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로 깊은 인상을 준 배우 홍경인, 최후까지 명성황후를 보필하는 홍계훈 역은 뮤지컬 전문배우 김민수씨가 맡았고 운명의 맞수 대원군은 성악가 윤치호씨가 열연했다.

그 즈음 공무원의 부정부패 척결을 내건 사정 한파로 정국은 꽁꽁 얼어붙어 있었고 민생 안정을 위한 고민이 대두되기 시작했다. 김영삼 대통령은 광복 50주년을 맞아 역사바로세우기를 강조하면서도 민생정국으로의 전환을 시사했다. 그러면서 우선 국민 정서를 어루만지기 위해 뮤지컬 명성황후의 관람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1996년 1월 13일 김영삼 대통령은 김수환 추기경과 함께 명성황후를 관람하기 위해 예술의 전당을 찾았다. 일반 관람객 2,200명이 자리를 가득 메운 이날 공연은 도중에 갑자기 전기가 끊겨 한동안 중단되기도 했다.
김영삼 대통령은 공연을 끝까지 관람한 후 공연을 마친 배우와 관계자들을 만나 제작진과 배우들의 노고에 고마움을 표시하고 “명성황후 시해사건의 역사적인 교훈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후손에게 어느 나라도 함부로 넘볼 수 없는 힘 있는 나라, 자랑스런 조국을 물려주어야 합니다.”(3)라고 말했다.

뮤지컬 명성황후는 1995년 12월 30일부터 96년 4월 24일까지 연장공연과 앙코르공연을 하며 10만여 관객을 동원했다. 불황의 늪에서 헤어나질 못하고 있던 연극계에서 연일 매진 사태를 빚은 뮤지컬 명성황후는 단연, 최고의 흥행작이 되었고 그해 열린 제2회 한국뮤지컬 대상 시상식에서 대상을 차지했다.
그리고 1997년 마침내 뉴욕 링컨센터에 있는 뉴욕주립극장에서 공연돼 대성황을 이루며 해외 진출의 꿈을 이뤘다. 이어서 2009년에는 명성황후를 시해한 범인들이 대거 동원된 가해자의 땅, 일본 구마모토에서 공연했다. 공연일은 명성황후의 기일인 10월 8일이었다.

(1)인용 -「명성황후 뮤지컬로 조명/에이콤 제작발표회」 『한겨레』1995.9.14.
(2)인용 -「명성황후 비운의 삶 뮤지컬로 재조명」 『세계일보』1995.12.26.
(3)인용 - 보도자료 「김영삼 대통령 뮤지컬 명성황후 관람」1996.1.13.
참고자료
참고자료
  • 「’공들인 기획’으로 불황 탈출/흥행작 중심으로 본 96 연극계」 『문화일보』 1996.12.27.
  • 「구성­무대장치 조화 감동적/뮤지컬 「명성황후」를 보고」 『세계일보』1996.1.10.
  • 「뮤지컬 「명성황후」를 보고/구히서연극평론가」 『국민일보』 1996.1.11.
  • 「웅장한 무대 뛰어난 연출 “장관”/뮤지컬 「명성황후」내일 막내려」 『한국일보』1996.1.8.
  • 「이젠 「민심세우기」… 민생안정론 고개/연말정국 여권 움직임」 『세계일보』1995.1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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