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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티고 나아가라!” 불멸의 승부사 ‘조치훈(趙治勳)’ 명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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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정보 본인방 , 문화훈장 , 십단전 , 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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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한국인이 아니었다면 오늘의 내가 되지 못했을 것이다."
- 조치훈, 1975년 『경향신문』 인터뷰 내용 중에서

1980년 11월 6일 일본 아타미에서 벌어진 명인전 6번째 대국. 장고를 거듭하던 조치훈 8단이 조끼와 넥타이를 풀어 제쳤다. 상대는 일본 바둑 최고의 기량을 지닌 오타케 히데오(大竹英雄) 9단. 5번째 대국까지 3승 1무 1패를 기록하며 타이틀까지 1승만을 남겨놓은 상황이었지만, 조치훈이 최고수 명인이 되는 길은 그리 쉬워 보이지 않았다. 초읽기에 몰린 조치훈은 평소 습관대로 성냥개비를 잘게 부러뜨렸다. 10초, 9초, 8초…. 이럴 때일수록 버티고 나아가는 투지가 필요했다. 열세한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는 ‘끈기의 바둑’. 조치훈은 바둑판을 응시했다. 그리고 회심의 검은 돌을 올려놓았다.
결과는 한집 반 승리! 소요시간 16시간 30분, 247수 만에 거둔 승리였다. 이로써 24세의 젊은 청년 조치훈은 4승 1무 1패의 기록으로 제5기 명인 타이틀을 획득했다. 한국인으로는 처음이었고, 외국인으로는 중국 출신 임해봉 9단에 이은 두 번째 쾌거였다.

일본 바둑계의 최정상을 정복한 조치훈은 1980년 12월 28일 일시 귀국했다. 짙은 베이지색 양복에 상기된 얼굴로 김포 국제공항에 내린 조치훈 명인은 “오고 싶었던 고국 땅을 밟게 되어 기쁘다.”(1)고 한국어로 소감을 밝혔다. 입버릇처럼 “명인(名人)이 되고 난 후에라야 다시 고국의 땅을 밟겠다.”(2)고 말하던 그였다.
전두환 대통령은 12월 29일 청와대에서 조치훈 명인을 접견하고 바둑을 통해 국가의 위상을 높인 공로를 인정해 은관 문화훈장을 수여했다. 최고 권위를 자랑하는 '명인‘ 타이틀을 쟁취한 이상, 일본 바둑계의 판도는 조치훈 명인의 등장으로 커다란 변혁의 시대를 맞게 될 것이라고 전망하며 격려의 말도 아끼지 않았다.(3) 전두환 대통령은 젊은 시절 같은 장교인 중대장에게 바둑을 배울 정도로 관심이 많았고 청와대에 들어와서도 10개월 간 정수현 9단에게 개인 지도를 받을 만큼 바둑에 대한 애정이 각별했다. 전두환 대통령과 조치훈 명인은 명인 타이틀을 쟁취하던 마지막 대국을 화제 삼아 환담을 이어갔다.

고국에서 감격의 새해를 맞은 조치훈은 특별한 기념행사를 가졌다. 조훈현 8단과 맞붙은 두 차례의 기념 대국! 공식 대국은 아니었지만,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열리는 한·일 두 나라의 정상급 기사의 대국이라는 점에서 관심이 뜨거웠다. 주최 측인 동아일보와 대국실이 마련된 롯데호텔은 일부 극성팬들이 수시로 전화를 걸어 대국 경과를 묻는 바람에 안 그래도 바쁜 연말연시에 일대 혼란을 겪어야만 했다. 이처럼 바둑계와 팬들의 이목을 집중시키며 진행된 1차 대국은 10시간에 걸친 대접전 끝에 흑을 쥔 조치훈 명인이 198수 만에 3집 반 차로 승리했다. 새해 1월 2일 KBS TV에서 진행된 2차 대국에서도 조치훈 명인이 5집 반 차이로 승리했다. 조치훈 명인은 “승운이 좋아 이긴 것 같다. 내용상으로는 조 국수에게 졌다.”(4)고 겸손한 모습을 보였다. 조훈현 국수는 “과연 명인답다.”(4)며 조훈현 명인의 실력을 높이 평가했다. 이를 기념해 국기원에서는 조치훈 명인에게 ‘국수’ 칭호를 수여했다.

일본으로 돌아간 조치훈 명인은 산비탈을 구르는 눈덩이처럼 걷잡을 수 없는 속력을 보이며 1981년 ‘본인방’ 타이틀 획득, 1982년 ‘십단전’ 우승, 1983년 일본 제1의 ‘기성위’ 타이틀까지 정복함으로써 일본 바둑계를 천하 통일하는 위업을 달성했다. 1988년에는 ‘본인방’ 10연패 달성이라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수립하며 신과 같은 존재로 추앙되었다.
열세한 바둑에서도 절대 물러서지 않는 끈기와 투지로 세계적인 바둑 기사의 자리에 오른 조치훈! 그는 2014년 도쿄 일본기원에서 벌어진 제4기 일본 ‘마스터스컵’에서 우승하며 자신이 보유하고 있던 일본 바둑계 역대 최다 타이틀 기록을 73승으로 갈아치웠다.

(1)인용 -「조치훈명인 귀국 “성원해준 국민들에 감사”」 『경향신문』 1980.12.29.
(2)인용 -「조치훈 명인 오늘이 있기까지 18년 만에 약속 지킨 집념의 쾌거」 『경향신문』 1980.11.7.
(3)당시 국내의 분위기를 다룬 기사를 바탕으로 대통령의 말을 재구성해 본 창작입니다.
(4)인용 -「조명인에 국수 칭호수여」 『동아일보』 1981.1.5.
참고자료
참고자료
  • 「조치훈 일명인위에」 『동아일보 1980.11.7.
  • 「조치훈 명인 오늘이 있기까지 18년 만에 약속 지킨 집념의 쾌거」 『경향신문』 1980.11.7.
  • 「일 바둑 정상정복 조치훈 명인」 『동아일보』 1980.12.15.
  • 「조치훈명인 귀국 “성원해준 국민들에 감사”」 『경향신문』 1980.12.29.
  • 「조치훈 명인에 훈장」 『동아일보』 1980.12.29.
  • 「조명인에 국수 칭호수여」 『동아일보』 1981.1.5.
  • 「조치훈 일바둑 석권」 『동아일보』 1983.3.18.
  • 「73번째 우승컵 차지 조치훈 9단 스토리-일본 최다승 경신」 『일요신문』 2014.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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