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한만남

제 5공화국 경제의 심장 '김재익' 전 경제수석비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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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 10월 9일, 오전 10시 25분(한국시간 낮 12시 55분) 버마의 아웅산 국립묘지에서 대형 폭발사건이 일어났다. 버마는 전두환 대통령의 서남아 대양주 6개국 순방의 첫 방문지였다. 남한과 북한의 체제 대결이 그 어느 때보다 격렬하던 당시, 전두환 대통령은 중립을 고수하는 비동맹 국가와의 외교를 위해 버마 다음으로 인도, 호주, 뉴질랜드, 스리랑카, 브루나이를 방문할 예정이었다. 이날 아침 전 대통령의 묘지 참배에 배석하기 위해 미리 도열 중이던 공식, 비공식 수행원 17명이 폭발로 사망하고 14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건국 이래 이렇게 많은 각료가 한꺼번에 희생된 적은 없었다. 더욱이 KAL기 사건이 터진 지 꼭 39일 만에 또다시 벌어진 악몽같은 사태였다. 현장에서 체포된 범인은 북한공작원으로 밝혀졌다. 북한은 전 대통령의 목숨을 노렸지만 현장에 늦게 도착해 화를 면했다.
이 사건으로 순직한 정부 고위 관리 중 김재익 경제 수석비서관은 한국 현대경제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가 유명을 달리할 때까지 한국 경제정책의 절반 이상은 그로부터 나온 것이나 다름없었다.

학창 시절의 김재익은 타고난 지적 호기심과 탐구욕으로 공부를 참 좋아했고 또 열심히 하는 학생이었다. 서울대학교 정치학과를 마치고 한국은행에 수석으로 입사했지만 공부에 대한 미련을 버릴 수 없었던 김재익은 회사를 다니면서 대학원에 진학해 국제정치학을 공부했다. 그는 한국경제를 공부하기 위해 유학을 떠나 하와이 대학에서 경제학을 공부하고 스탠포드 대학원에서 통계학 석사과정과 경제학 박사과정을 동시에 밟으며 왕성한 연구활동을 했다. 한국에 돌아온 김재익 박사는 경제기획원에서 일하며 한국경제의 미래를 내다보고 여러 정책을 구상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의 정책은 번번히 엄청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그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위협도 서슴지 않았다. 결국 김재익은 경제기획원에 사표를 제출했다. 그러나, 전두환 대통령은 그를 국보위원회 경제과학 분과위원회 위원장직을 맡겼다. 김재익은 몇 번을 고사했지만 전 대통령은 들어주지 않았다.
“각하, 제가 생각하는 경제정책은 인기도 없고 또 기존 세력들이 환영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누군가는 이 일을 해내야만 합니다. 그래도 저를 쓰시겠습니까?”
전두환 대통령은 그렇다고 답했다.
“그렇다면 한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제가 드리는 조언대로 정책을 추진하시려면 엄청난 저항에 부딪칠 텐데 그래도 끝까지 제 말을 들어주실 수 있겠습니까?”
전두환 대통령의 생각은 확고했다.
“여러 말할 것 없어. 경제는 당신이 대통령이야.”(1)

전 대통령의 다짐은 진짜였다. 김재익 박사를 이상주의자라고 비난하고 원리에 매달리는 교과서주의자라고 공격하는 인물은 누구라도 가차없이 청와대를 떠나야 했다. 일찍부터 규제철폐와 시장개방, 국제화 등을 주장했던 그는 정부 주도의 경제정책을 민간 주도의 시장경제 체제로 바꾸는 경제개혁을 단행했다. 철저히 안정주의자였던 그는 성장 일변도의 기존 방식을 근본부터 고쳐야 한다고 생각했다.
김재익 박사는 물가잡기로 대표되는 경제안정화 정책을 추진해 나갔다. 그의 모든 정책은 경제 자율화를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 전두환 대통령은 김재익 박사를 경제수석비서관으로 임명해 힘을 실어주었고 그는 절대 권력의 울타리에서 누구도 감히 시도하지 못했던 경제자율화의 터전을 만들어갔다.
실패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특히, 노동부문을 소홀히 한 점은 많은 비판을 받았다. 경제성장에 따라 노동환경도 함께 개선해야 함을 간과한 결과, 노동문제는 우리 사회에 갖가지 비극을 낳았다.
그럼에도 경제평론가들은 역대 경제수석 가운데 김재익 수석만큼 경제정책 전반에 걸쳐 큰 발자국을 남긴 사람이 없는 것으로 평가하고 있다. 부가가치세, 물가안정을 위한 정부예산동결, 미래를 주도할 통신산업의 육성, 금융실명제를 통한 지하경제 척결과 공정거래제도의 부활 등 김재익 경제수석비서관이 입안한 경제정책들은 우리나라 경제정책의 밑바탕이 되었다.

(1)인용 -「경제는 당신이 대통령이야」 『한겨레』 1992.1.10.
참고자료
참고자료
  • 「순간의 폭풍 단장의 절규」 『동아일보』1983.10.9.
  • 「모든 업무 정상」 『매일경제』1983.10.11.
  • 「아웅산 순국경제팀 정책기조 어떻게 됐나」 『매일경제』1984.10.9.
  • 「경제두뇌 집결… 정책산실 30여년/“기획원의 핵” 경제기획국」 『서울신문』1993.4.26.
  • 「金在益은 어디로 갔나」 『문화일보』1998.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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