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한만남

한국 여자농구의 전설 ‘박신자’

한국 여자농구의 전설 ‘박신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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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2회 국무회의 안건-일반회계 예비비 지출(제5회 세계여자농구단 환영경비 보조)
박정희 대통령 내외분 박신자 농구선수단 접견
박정희 대통령 내외분 박신자 농구선수단 접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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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대통령 박신자 농구선수 접견
박정희 대통령 박신자 농구선수 접견
박정희 대통령 박신자 농구선수 접견
박정희 대통령 박신자 농구선수 접견
박정희배 쟁탈 동남아여자농구대회 우승컵을 안은 한국상업은행 박신자 선수
대한뉴스 제647호-박신자 선수 은퇴
5.16민족상수상자(사회부문,산업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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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대통령 내외분 박신자 농구선수단 접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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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대통령 박신자 농구선수 접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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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6년 7월 5일 육군체육관에서 ‘한중 친선 여자농구대회’가 열렸다. 경기를 보기 위해 체육관을 가득 메운 관중은 우리나라 농구사상 처음으로 이만 오천 명을 기록했다. 이날 경기는 최종 점수 36대 28로 우리나라가 승리를 거두었고 관중들은 일제히 일어나 선수들에게 아낌없는 박수를 보냈다. 코트에는 경기 내내 눈부신 활약을 보인 아시아 최고의 센터 박신자 선수가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박신자’는 한국 여자농구 센터 계보의 맨 처음에 회자하는 이름이다. 숙명여중 2학년 때 농구선수로 기용돼 3학년 재학시절에는 이미 대표선수로 뽑혀 홍콩 마닐라에서 전승의 기록을 세운 그의 이름 앞에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맞수 없는’ 등의 수식어가 늘 따라붙었다.

1961년 2월 14일 일본농구협회의 초청으로 일본 일류급 여자 실업농구팀과 벌인 경기는 조국의 명예가 달려있었다. 선수들은 이를 악물고 뛰었고 구전 전승의 전적으로 일본 여자농구계를 완전히 제압했다. 한국상업은행 여자농구단 일행이 김포공항에 도착했을 때 선수들은 엄청난 꽃다발 세례와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공항에 모인 군중들은 단 하나의 이름 ‘박신자’를 연호하며 열광했다.
그런 박신자에게 슬럼프가 찾아왔다. 선수 자신도 팬들도 믿기 싫은 일이었다. 경기 마다 평균 득점 20점을 훌쩍 넘었던 박신자 선수가 부진하자 급기야 은퇴설까지 나돌았다. 농구계는 물론이고 팬들과 관계자들의 반대가 빗발쳤다.
박신자 선수는 돌연 코트에서 사라져버렸다. 국민들이 원하는 박신자를 다시 보여줄 수 있을지 의문은 깊어졌다. 그러나 박신자는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
복귀 후 첫 경기는 동남아 여자 농구대회였다. 이 경기에서 그는 한 게임에서 40점을 득점했고 전 대회에서 최고득점을 올리며 눈부시게 부활했다. 슬럼프에서 탈출한다 해도 과거의 기량을 다시 펼치기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하지만 박신자는 해냈고 건재함을 과시했다. 팬들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농구팬들은 “나는 여자농구를 보러 가는 것이 아니야. 박신자 선수를 보러 가는 거야”라고 할 정도였다.

1964년 제4회 세계여자농구선수권대회 예선 리그, 아르헨티나, 체코슬로바키아, 유고슬라비아와의 게임에서 혼자서 67점을 득점한 박신자 선수는 최우수선수라는 찬사를 받으며 한국팀을 예선리그 최우수팀으로 이끌었다.
각국에서 대회 취재를 온 체육기자들은 박신자를 야신파르라 불렀다. 페루 현지 발음으로 박신자의 이름은 그렇게 불렸다. 그것은 스페인어로 무적이라는 뜻이었다. 박신자의 명성은 세계로 뻗어 나갔다. 한 대회 관계자는 외교관 백 명보다 코리아를 알린 효과가 더 컸을 것이라고 말했다.

1967년 체코슬로바키아에서 개최된 제5회 세계여자농구대회에서 한국팀은 세계의 강호를 물리치고 은메달을 목에 걸었다. 이 대회에서 한국팀은 2위였지만 각국의 기자들이 뽑은 대회 최우수선수에는 박신자 선수가 선정됐다. 우승팀이 아닌 선수가 대회 최우수선수에 뽑혔지만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그날 밤 육영수 여사는 주장 박신자 선수에게 전화를 걸어 “체코슬로바키아를 눌러 이겼을 땐 어찌나 기뻤던지 눈물을 흘렸다.” 고 말하며 선수들의 노고를 위로하고 “전 국민이 여러분들의 선전을 기뻐하며 무사히 귀국하기를 바란다”는 격려의 말을 전했다.(1)
여자농구단은 대대적인 환영을 받으며 입국했고 청와대의 초청도 받았다. 박정희 대통령은 선수단 단장과 임원, 박신자 선수를 비롯한 12명의 선수 전원에게 국민훈장 석류장 수여했다.
한국 여자농구의 여명기인 54년 봄, 운동 잘하는 선배 언니들이 부러워 농구공을 처음 만지기 시작했던 13세의 단발머리 소녀는 1967년 11월 2일, 장충체육관에서 그가 사랑하던 농구와 팬들에게 작별을 고했다. 이날 은퇴식에는 약 8천 명의 팬들과 은사, 선배 그리고 옛 동료 선수들이 모여 코트에 서는 그의 마지막 순간을 함께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11월 3일 오후 청와대에서 농구계를 은퇴한 박신자 선수를 접견했다. 박 대통령은 5.16 민족상과 부상을 수여하고 체육을 통해 국위를 높인 그의 공적을 높이 치하했다.
승리의 영광을 상징하던 등번호 14번은 코트를 떠났지만 박신자, 그는 천부적인 자질과 초인적인 인내로 착실히 성장해 우리나라 여자농구를 아시아 정상에 올려놓은 원동력으로 여전히 기억되고 있다.

(1)인용 -「여자농구단 7일 입국 대대적인 환영 준비」 『동아일보』1967.5.3.
참고자료
참고자료
  • 「양우 숙명에 석패 이만오천관중 열광 또 열광」 『경향신문』1956.7.5.
  • 「구전전승의 기록」 『동아일보』1961.3.2.
  • 「장하다! 잘싸웠다! 상은여자농구팀 어제 귀국」 『경향신문』1961.3.20.
  • 「은퇴할까? 백만불의 센터 박신자」 『경향신문』1963.8.22.
  • 「여자농구 한국자랑 박신자는 건재했다」 『경향신문』1964.2.25.
  • 「박신자 선수에 우수상」 『동아일보』1964.4.23.
  • 「뛰어난 개인기 지역방어로 질풍의 공세 박신자 27점」 『경향신문』1967.4.17.
  • 「여자농구단 7일 입국 대대적인 환영 준비」 『동아일보』1967.5.3.
  • 「승리의 화신 박신자 선수 베일 속의 정상은퇴」 『동아일보』1967.10.14.
  • 「박신자 무패 14번 14년만에 고별」 『경향신문』1967.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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