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한만남

서해 외로운 섬에 빛을 밝힌 ‘베네딕트 즈웨버(Benedict Zweber)’ 신부

서해 외로운 섬에 빛을 밝힌 ‘베네딕트 즈웨버(Benedict Zweber)’ 신부

첩보처리철-덕적도 전화시설 운용 실태(즈웨버 신부)
육영수 여사 덕적도에서 봉사하는 미국 신부일행 접견(최분도 신부)
육영수 여사 덕적도에서 봉사하는 미국 신부일행 접견(최분도 신부)
육영수 여사 덕적도에서 봉사하는 미국 신부일행 접견(최분도 신부)
김종필 국무총리 덕적도 천주교 신부 국민훈장 수여
김종필 국무총리 덕적도 천주교 신부 국민훈장 수여
덕적도 천주교 신부 재서 여사 국민훈장 석류장 수여 후 기념촬영(최분도 신부)
대한뉴스 제833호-미국인 신부 훈장수여
첩보처리철-덕적도 전화시설 운용 실태(즈웨버 신부)
육영수 여사 덕적도에서 봉사하는 미국 신부일행 접견(최분도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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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필 국무총리 덕적도 천주교 신부 국민훈장 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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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적도 천주교 신부 재서 여사 국민훈장 석류장 수여 후 기념촬영(최분도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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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지는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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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3월 30일, 미국 뉴욕 메리놀 신학대학 대성당에 한국민요 '아리랑'이 울려 퍼졌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오...' 베네딕트 즈웨버(Benedict Zweber) 신부의 장례미사에 참여한 한인들이 아리랑을 구슬프게 따라 불렀다. ‘나를 버리고 가시는 임은….’ 신부가 눈을 감는 순간까지 애타게 기다렸다는 사람, 인천에 머물던 30여 년 동안 곁에서 손과 발이 되어 주었던 서재송(세례명 ‘비오’)이 추도사를 읊었다.
"아픈 환자든 국적을 알 수 없는 혼혈아든 신부님은 섬 주민 모두를 사랑으로 포용한 그야말로 살아있는 희생자였습니다." (1)
서재송은 신부와 함께 한 시간을 아련히 떠올리며 눈물을 훔쳤다.

한국 이름 ‘최분도’. 신부는 사제 서품을 받은 1959년 6월 메리놀 선교회에 한국 선교사업을 자원했다. 한국행을 결정한 이유에는 둘째 형 ‘메달드 즈웨버’의 영향이 컸다. 당시 미 경제조정관실(OEC) 직원으로 근무하며 불우한 고아를 돕던 형은 1956년 8월 여름, 광나루에서 어린이 두 명이 급류에 휩쓸려 떠내려가는 것을 구출하고 사망했다. 고인의 모습에 깊은 감명을 받은 신부는 한국행을 결정하고 선교활동에 나섰다.

첫 주임 신부로 부임한 곳은 연평도였다. 이를 인연으로 즈웨버 신부는 30여 년 선교활동 중 14년을 섬에서 보내게 된다. 당시 서해에 고립된 섬사람들은 현대문명의 혜택은커녕 가난과 질병이라는 운명을 짊어지고 살아야 했다. 신부가 가장 사랑한 섬 덕적도도 예외는 아니었다. 우선, 즈웨버 신부는 질병에 시달리는 어민들을 위해 낡은 미군 함정을 인수해 병원선으로 개조하고 진료에 나섰다. 병원을 찾지 못하는 환자들을 위해서는 손수 약을 지어 방문했다. 그러다 보니 고생이 말이 아니었다. 연평도 인근 14개의 섬을 오가느라 돌풍에 배가 뒤집혀 죽을 고비를 넘기기를 몇 차례, 풍랑에 북한 땅까지 흘러들어 가기도 했다. 그러면서 신부는 한국에 온 지 5년 만에 한국말을 완전히 배우고 보리밥을 먹는 생활에도 익숙해졌다. 하천공사나 전기공급과 같이 험한 일에는 허름한 작업복에 삽과 곡괭이를 들고 뛰어들었다. 그러자 외국인 신부를 경계하던 주민들도 그의 순수함과 열정에 매료되어 미사가 있는 날이면 하나 둘 성당에 모여들었다.

신부는 더 부지런히 섬사람들을 찾아다니며 삶의 의욕을 북돋았다. 연평도에 종합무료병원과 유치원을 만들고, 덕적도 주변에는 간척지를 개간해 2,700섬의 쌀을 생산했다. 서해안 북부 지역도 김 양식이 가능하다는 것을 입증해 보이기까지 했다. 술 없는 마을, 노름 없는 마을, 일하는 마을을 만들어 어촌의 현대화를 앞당기려고 고군분투한 세월이 어느새 십여 년이 되었다. 이런 즈웨버 신부를 『코리아 라이프』 지(1970년 7월)는 ‘무지와 빈곤을 쫓은 기적의 종’으로 묘사했다.

우리 정부도 즈웨버 신부의 헌신적인 노력을 인정해 1971년 6월 22일 국민훈장 동백장(2급)을 수여했다. 함께 구호에 나선 신부의 어머니 ‘이벨린 즈웨버’에게는 국민훈장 석류장(3급)을 수여했다. 김종필 국무총리로부터 훈장을 수여받은 신부는 한국말로 수상소감을 전했다.
“한국의 어민들이 불쌍합니다. 어촌의 사채이자가 너무 높습니다. 환자들도 많지만, 남편들인 어부들의 사망으로 과부가 많습니다. 종합적인 대책이 필요합니다.”(2)
개인에게는 영광스러운 자리였지만, 신부의 마음속에는 오로지 가난과 질병에 시달리는 서해고도의 섬사람들이 아리랑처럼 아리고 쓰리게 박혀있었다. 신부와 그의 어머니를 직접 만난 육영수 여사는 그동안의 봉사와 노고에 감사와 치하를 아끼지 않으며, 박정희 대통령의 저서 『to build a nation』에 직접 서명해 선물했다.(3)

‘서해의 별’, ‘인간등대’, ‘덕적도의 슈바이처’라 불리던 베네딕트 즈웨버 신부는 1990년 한국을 떠나는 순간까지 의료, 입양 등 구원의 손길을 내밀었다. 그 따뜻한 마음을 잊지 못한 서해고도 사람들은 서포리 해수욕장 인근 노송 동산에 공덕비를 세우고 지금도 신부의 업적을 기리고 있다.

(1)서재송씨의 인터뷰 내용중에 추도문에 어울리는 부분을 인용해 사용했습니다.「인터뷰/최신부와 함께한 서재송씨」『경인일보』 2007.5.16.
(2)인용 -「인간등대 11년 덕적도 일깨운 줴버신부모자」 『경향신문』 1971.6.26.
(3)기사 내용을 토대로 상황을 구성했습니다.「박정희 전 대통령 一家 친필 사인 11점 경매에」 『조선일보』 2013.10.25.
참고자료
참고자료
  • 「인터뷰/최신부와 함께 한 서재송씨」 『경인일보』 2007.5.16.
  • 「벽안의 최분도 신부」 『경인일보』 2007.5.16.
  • 「인간등대 11년 덕적도 일깨운 줴버신부모자」 『경향신문』 1971.6.26.
  • 「섬사람돌보기 3년」 『경향신문』 1964.11.14.
  • 「박정희 전 대통령 一家 친필 사인 11점 경매에」 『조선일보』 2013.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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