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한만남
가난한 이들의 아버지 ‘죠지 캐롤(George Carroll)’ 주교
관련정보
성 라자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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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지는 만남관련인물이 없습니다. 어서 그 날이..." - 1962년 9월 3일, 『경향신문』 인터뷰 내용 이른 아침부터 죠지 캐롤(George Carroll) 주교에게 반가운 손님이 찾아왔다. 1년 전 수원 인근 정착촌으로 내려가 살림을 꾸리기 시작한 남자였다. 작은 노점을 시작하게 되었다는 남자는 연신 머리를 조아리며 “감사합니다.”를 연발했다. 빈손으로 시작할 때는 수심이 가득하더니, 얼굴에서 미소가 떠날 줄 몰랐다. 주교는 작은 도움도 잊지 않고 찾아와 미소로 화답하는 한국의 가난한 사람들이 좋았다. ‘가난한 이들에게 안식과 축복이 함께 하기를….’ 주교는 인사를 받느라 내려놓았던 물품들을 다시 챙기기 시작했다. 순천으로 보낼 옷과 식량들이었다. 9월의 아침이었지만, 햇볕은 뜨겁고 사제복은 금세 땀으로 젖어버렸다.(1) 평생을 한국에 머물며 ‘가난한 이들의 아버지’라 불린 주교는 신부로 서품되던 1931년 우리나라에 와서 11년간 평양에서 봉직했다. 그러던 중 일제에 의해 강제추방되었다가 해방이 되자 주교는 한달음에 서울로 돌아와 ‘가톨릭구제위원회’를 만들고 외국인들로부터 양곡과 물자를 기부받아 본격적인 빈민 구호에 나섰다. 특히, 한국전쟁을 전후로 전국의 나병(한센병) 환자들이 궁핍한 생활에 노출되는 경우가 많았다. 온몸이 썩어들어가는 육체와 슬픈 운명 속에서 ‘문둥이’라고 손가락질까지 받아야 하는 사람들을 본 캐롤 신부는 한국전쟁이 일어나기 직전인 6월 2일 광명시 인근에 ‘성 라자로원’을 창립하고 서울 인근 나환자들을 돕기 시작했다. 전쟁 초기 1·4 후퇴로 피난행렬을 따라 내려간 부산에서는 분산된 외국의 원조기관을 조율하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구제가 필요한 곳이라면 어디든 손을 내밀었던 캐롤 주교였다. 윤보선 대통령은 주교의 공헌을 인정해 1961년 2월 9일 문화훈장을 수여했다. ‘한국의 사회문화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했을 뿐만 아니라, 미국 교회와 친지 그리고 주한유엔 장병들에게 한국의 찬란한 문화를 적극 소개’하고, ‘사제로서 한국의 고학생, 전쟁미망인, 반공포로, 석방청년, 부랑아, 고아들을 돌보아준 구호 사업과 형무소 빈민굴을 찾아다니면서 위로와 격려를 준 것’에 깊은 감사의 뜻도 전했다. (2) 이에 캐롤 주교는 죽을 때까지 한국에서 일하겠다는 의지와 한국의 통일을 기원했다. “몸은 가지고 나왔으나 마음만은 거기에 두고 나왔다.”고 말할 정도로 평양을 사랑했던 캐롤 주교의 얼굴에는 한국인의 안녕과 평화를 염원하는 마음이 담겨 있었다. 가난하고 소외된 한국인들에게 삶의 터전을 마련해 주고 구제의 손길을 내밀던 죠지 캐롤 주교! 그가 설립한 ‘성 라자로’ 마을은 60년 이상 나환자들의 안식처가 되어주었다. ‘성 라자로’ 사람들은 주교가 몸소 실천했듯이 더 어려운 처지의 나환자들에게, 민족과 국경을 초월하여 과거에 받았던 사랑과 은혜를 갚아나가고 있다. 한 사람이 뿌린 희망의 씨앗이 건강하고 튼튼한 나무가 되어 세계의 많은 이들에게 나눔과 사랑이라는 열매를 전하고 있는 것이다. (1)참고 -「쉴 새 없는 재민구호」 『경향신문』 1962.9.3. (2)인용 -「캐주교에 문화훈장」 『경향신문』 196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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